2013년 9월 12일 목요일

블로그 둥지를 옮기게 됐습니다.

우리나라에서의 원활한 구글 서비스 좀더 구체적으로 말하자면 블로그스팟 플랫폼에 대한 지원은 잘 안되나 봅니다.

브라우징 속도에 있어서 상대적으로 조금 떨어지고(이것 저것 사이드 기능이 추가되면 상당히 무거워지는...)

경쟁력에 있어서 약간 부족한 느낌이 들어

티스토리로 이사를 가게 됐습니다.

현재 이곳의 포스팅들을 이동중이고 모든 글들이 옮겨지면 이 블로그는 삭제할 예정입니다.

제 포스팅을 즐겁게 읽어주시고 방문해주신 분들께 양해를 구하며

sparkyfootball.tistory.com

이곳에서 다시 인사드리겠습니다.

감사합니다.

스파키의 유쾌한 축구이야기!

2013년 9월 2일 월요일

[스파키의 풋볼이슈] 진격의 리버풀

 최근 몇시즌 동안 EPL 전통의 강호로써의 면모를 보여주지 못하며 맨체스터 시티, 첼시 등에게 떠밀려 한물 갔다는 등의 혹평을 듣기까지에 이른 리버풀이 아무래도 올시즌은 뼈를 깎는 준비를 하지 않았나 할 정도로 쾌조의 스타트를 보여주고 있습니다.

 개막 이후 리그 2연승, 주중 리그컵 승리 등을 통해 보여준 완벽한 미드필드 플레이는 지난 시즌 부임한 브랜든 로저스 감독 방식의 티키타카가 제대로 자리 잡았다고 보입니다. '게겐 프레싱' 또한 확실히 선수들의 몸에 익었다는 것을 증명해보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올시즌 페페 레이나를 나폴리로 임대를 보내고 새로이 영입된 벨기에 수문장 시몬 미뇰렛의 안정감(사실 레이나가 잔실수가 많은 편이죠.), 시즌 세 경기에서 5득점을 기록한 다니엘 스터리지의 맹활약 등은 리버풀이 시즌 초반 질주할 수 있는데 더욱 힘을 실어 주고 있습니다.

  그리고 바로 어제 일요일(한국 시간 기준) 올시즌 첫 레즈 더비가 열렸는데요. 리버풀의 홈인 안필드에서 빌 샹클리 100주년을 기념하는 날이기도 하여 팬들의 주목을 많이 받기도 했습니다.
빌 샹클리를 기념하는 콥의 카드섹션 퍼포먼스

  경기가 시작되자마자 리버풀은 루카스-제라드-헨더슨의 미드필드 진영을 중심으로 전방에서부터 스터리지, 쿠티뉴, 아스파스가 끊임없이 강하게 맨유 수비진영을 압박했고 맨유에서 지난 시즌 탁월한 볼 배급력을 선보이던 마이클 캐릭에게 공간을 내어주지 않으며 맨유가 공격을 전개하는데 어려움을 겪었습니다.

 경기 초반 강한 압박을 통해 경기시작 4분만에 코너킥을 따냈고 제라드의 코너킥을 아게르가 머리로 완벽하게 맨유 골문쪽으로 꺾어놓은 공을 골대를 등지고 서있던 스터리지가 감각적인 백헤딩으로 선취골을 기록하기에 이릅니다.
전반 4분 스터리지의 골장면

 이른 시간에 실점을 한 맨유는 리버풀의 압박을 털어내기 위해 계속해서 노력하지만 리버풀 전방의 무한 압박과 헨더슨과 제라드의 헌신적인 움직임으로 전반이 끝날때까지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습니다. 애슐리 영은 리버풀의 글렌 존슨에게 번번히 막혔고 로빈 반 페르시와 함께 부상을 당한 웨인 루니를 대신해 선발 출장한 웰백은 리버풀의 미드필드와 수비진 사이에서 우왕좌왕하는 모습을 보여주며 반 페르시 홀로 리버풀 수비진을 헤치며 기회를 만들어 냈으나 무산되며 득점에 실패합니다.

 이른 시간 실점을 당하고 풀리지 않는 경기로 바짝 예민해진 맨유 선수들과 이에 지지 않으려는 리버풀 선수들이 거칠게 부딪히는 장면이 많았는데요. 총 6장의 옐로우 카드가 나오며 주심의 손발을 바쁘게 했습니다. 그중 특히 제라드와 반 페르시의 설전은 경기를 보는 팬들에게 더비 매치의 뜨거움을 선사했습니다.


  경기 후반 초반 리버풀이 보여준 강한 압박이 약간 느슨해지고 공간이 조금 벌어졌고 캐릭의 패스가 간간히 성공하며 맨유의 템포가 조금씩 살아나기 시작했습니다.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던 맨유의 영을 대신해 나니가 나와 활발한 움직임을 보여줬지만 리버풀의 골문을 여는데는 실패했습니다. 필 존스의 부상으로 인해 발렌시아를 교체카드로 쓴 맨유는 긱스를 빼고 치차리토를 투입하며 공격의 고삐를 당겼지만 역시나 리버풀을 골문을 여는데는 실패했습니다.

 결국 전반 4분만에 터진 스터리지의 골이 결승골로 이어지며 안필드에서 승리를 거두었고 1994년 이래 처음으로 리버풀은 개막 이후 3연승을 기록하게 됩니다.
올시즌 알렉스 퍼거슨 경의 후임자로 온 데이비드 모예스 감독은 에버튼 시절부터 이어오던 안필드 무승이라는 타이틀을 깨는데 실패합니다.(어제 경기 포함 7무 6패)

 이 경기가 끝나고 리그 1위 자리를 리버풀FC가 차지하게 됩니다.

 맨유에게는 중원 보강이 절실하게 요구된 경기였다는 생각이 듭니다. 에버튼의 마루앙 펠라이니 영입 소식이 계속해서 보도되고 있지만 공식 발표가 아직 없어 가뜩이나 아무런 영입 소식이 없어 (게다가 리버풀에게 져버린) 맨유팬들의 속은 답답한 지경입니다.

 이에 반해 리버풀은 안필드 관중석에 티아고 일로리, 빅터 모제스(임대) 등이 앉아 경기를 관전하는 모습이 카메라에 잡히며 이적 시장 막바지에 알찬 영입을 성공했음을 알렸습니다.
리버풀에 입성한 티아고 알로리

2013년 8월 29일 목요일

[스파키의 축구이야기] NO.7 Superstar (1)

ALL COPYRIGHT TO 스파키

  모든 관중이 숨을 죽인채 프리킥을 준비하는 등번호 7번이 적힌 스킨 헤드의 한 남자를 바라보고 있다. 남자는 공을 놔두고 몇걸을 뒤로 물러나 2초 가량 멈춰있다가 힘차게 달려가 공을 찬다. 공은 멋들어지게 휘어 골대 왼쪽 그물을 흔들었다.

  남자는 관중석을 향해 미친듯이 달려가 점프하며 오른팔을 하늘로 내질렀고 큰 대자를 그리고 서서 포효한다. 관중석은 이미 광란의 도가니.

  스킨 헤드의 이 남자는 '슈퍼스타' 데이비드 베컴이다.


  2002년 한,일 월드컵 최종 예선 마지막 경기인 그리스전에서 2대1로 끌려가며 본선 진출의 꿈이 물거품이 되기 일보 직전, 모든 정규시간이 끝나고 인저리 타임 3분에 얻어낸 프리킥은 당시 지역 최종 예선 같은조에 속해있던 독일이 네덜란드와 0대0의 스코어로 경기가 종료되 잉글랜드가 패하게 될 경우 플레이오프를 통하거나 최악의 경우 본선에 진출하지 못하는 상황을 뒤집어놓게 된다.
 이 극적인 프리킥 골은 베컴의 커리어에 길이 남을 골이 되었고 그 의미를 더했던 것은 소속클럽이였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홈구장인 올드 트레포드라는 것이다.

극적인 동점골로 잉글랜드를 본선에 올린 베컴의 프리킥

  수많은 프리킥의 대가들이 있음에도 우리는 '프리킥' 하면 베컴을 떠올린다.(많은 팬들, 베컴의 골수팬인 나도, 프리킥은 미하일로비치라는 것을 인정한다.) 왜냐하면 늘 극적인 상황에서 그의 프리킥이 골대 그물을 흔들었기 때문이다. 프리킥뿐만 아니라 코너킥, 크로스 등 먼거리로 공을 정확하게, 적당한 세기로 받아낼 수 있도록 보내주는 능력은 타의 추종을 불허했다.(소위 말하는 택배 크로스, 국내팬들 사이에서는 '백암택배' 라고 불리기도 한다.)

 베컴은 1975년 5월 2일 잉글랜드 런던의 레이튼스톤에서 태어났다.(풀네임은 David Robert Joseph Beckham) 미용사였던 어머니와 배관공인 아버지, 누나와 여동생이 있는 잉글랜드의 아주 평범한 가정이였다. 축구 종주국답게 여느 아이들처럼 베컴도 축구에 흥미를 보이며 집 주변에 있던 리지웨이 공원에서 공을 차며 꿈을 키웠다.
 그가 축구선수가 되겠다고 마음을 먹으며 있었던 재미있는 일화가 있다. 어느날 학교 수업 시간 도중 베컴에게 커서 무엇이 되고 싶냐는 질문에 '축구하는 사람이요.' 라고 그가 대답했고 이 대답에 선생님은 그게 아니라 어떤 직업을 가지고 싶냐는 말이라고 하자 '내가 정말 가장 하고 싶고 원하는게 축구인데요.' 라고 다시 이야기했다고 한다. 축구선수가 아닌 '축구하는 사람' 그저 축구자체가 좋았다는 것이다.
축구하는 사람이 되고싶다구요!!

  축구가 하고싶은 베컴은 런던을 연고로하며 자다가도 이름을 들으면 벌떡 일어날 정도로 열정적인 외할아버지가 응원하는 토트넘 핫스퍼의 유스캠프에 참여하게 됐고(이때부터 베컴과 토트넘의 인연은 시작된다.) 처음 정규 클럽의 유스팀 경험을 하게 된다. 그리고 짧은 기간 토트넘 핫스퍼 유스팀에서 활동을 하다가 브림스다운 로버스라는 유스 클럽에 입단한다. 그리고 1991년, 베컴이 16살이 되던 해 어느 겨울이였다.
 런던이 고향임에도 불구하고 북부 지방인 맨체스터 연고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를 열정적으로 응원하던 아버지의 권유로(이 결정은 토트넘에 입단하기를 원했던 장인어른, 즉 베컴의 외할아버지는 그리 좋아하지 않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를 대표하던 전설인 보비 찰튼 축구 교실에 참가한다.
 수많은 잉글랜드 내에서 공 좀 찬다하는 또래들이 이 축구교실에 참가했고 베컴 또한 그 중 일원으로 속해있었다. 너무 많은 참가자들로 인해 각자가 실력을 뽐낼 시간이 얼마 없었던 와중에 베컴이 공을 다루던 도중 보비 찰튼이 직접 그 장면을 목격했고(리프팅을 하던 중이였다.) 그 몇 번의 터치는 찰튼의 눈을 사로잡았다. 그리고 보비 찰튼이 선정하는 축구교실 우수 선수로 선정된다.(우리나라로 치면 차범근 축구대상과 비슷한 것이다. 영국에는 이런게 제법 많았는데 보비 찰튼 축구교실은 아주 대표적인 것이다.)
보비가 선정한 최고의 선수

  이 일로 인해 1991년 겨울, 베컴이 16살 막바지가 되던 때 당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감독이던 알렉스 퍼거슨으로부터 유스팀 입단 제안을 받았고 베컴의 아버지는 앞뒤 가리지 않고 베컴의 계약에 적극 동의했고 퍼거슨과 베컴의 아버지가 함께한 자리에서 베컴이 직접 계약서에 서명을 한다.(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에 대해서 베컴의 아버지는 장인어른 몰래 진행했다고 한다.) 이 장면은 베컴 자신의 인생에서 역사적인 순간이라고 했다.

알렉스 퍼거슨과 데이비드 베컴

  약 2년간 유스팀에서 머물며 1992년 5월 FA 유스컵 결승전에서 크리스탈 팰리스를 상대로 골을 기록하며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입단 이후 첫 득점을 만들어낸다. 그리고 그 해 처음으로 브라이튼 앤 홉 알비온과의 리그컵 경기에서 퍼스트팀 벤치 멤버로 교체 투입되며 경기에 뛰게된다.
  퍼스트팀에는 베컴이 뛸 수 있는 자리는 없었다. 스무살이 된 베컴은 조용히 때를 기다리던 중 당시 3부 리그 소속이던 프레스턴 노스 엔드로부터 임대 제의를 받았고 퍼거슨 감독은 베컴의 선발 출장 기회를 늘리고 경험을 쌓게 하고자하는 의도로 단기 임대를 보냈고 1994/95 시즌 임대를 가게 된다.

프레스턴에 단기임대를 온 베컴

 안정적인 출전기회가 주어졌고 프레스턴 오른쪽 미드필더는 베컴의 자리였다. 등번호는 4번. 3개월 가량의 임대기간 동안 베컴은 출전할때마다 프레스턴의 세트피스를 전담했고 5경기에 출전하며 2득점을 기록하는 등 짧은 기간 프레스턴에 강한 흔적을 남긴다.(특히 코너킥으로 골을 기록하기도 한다.)

프레스턴 임대기간 베컴의 활약상과 흔적들

  짧지만 인상 깊었던 임대 기간이 종료되고 맨체스터로 돌아온 베컴은 1994년 12월 7일 19살 베컴은 터키 갈라타사라이와의 UEFA 챔피언스 리그 경기를 통해 챔피언스 리그에 데뷔했고 퍼스트팀 경기를 뛴 이래 처음으로 골을 기록한다.

맨유 퍼스트팀에서의 첫번째 골

 임대 복귀 후 총 10경기를 뛰며 그 중 챔피언스 리그에서 기록한 득점이 시즌 유일한 득점이 된다. 그렇게 94/95 시즌이 끝이 났다.

  다가올 95/96 시즌 본격적으로 베컴의 이름이 퍼스트팀 스쿼드와 퍼거슨 감독의 라인업에 올라가기 시작한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 날지 못하는 네덜란드인, 베르캄프 이야기

* the Maestro, 지네딘 지단

2013년 8월 26일 월요일

[스파키의 풋볼이슈] 가레스 베일, 9천 9백만 파운드의 사나이가 될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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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토트넘과 EPL을 대표하는 슈퍼스타 가레스 베일의 레알 마드리드 이적이 초읽기에 들어갔는데요. 레알 마드리드 오피셜 유니폼 판매 홈페이지에 등번호 11번의 가레스 베일 유니폼을 올라온 사진이 인터넷에 떠돌았고 이는 현실성 없는 이적이라 주장하던 모든 이들에게 당혹감을 가지게 합니다.(지금은 홈페이지에서 지워진 상태입니다.)
 이 사건 이틀 뒤 베일이 스페인에 도착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기 시작했고 급기야 오늘자 데일리 메일을 통해 레알 마드리드가 9천 9백만 파운드의 이적료를 지불하고 베일 영입 성사 직전에 이르렀다고 알려집니다.
 바르셀로나의 네이마르 영입은 갈라티코 2기를 만들어낸 페레즈 회장의 자존심에 자극을 주었고 이에 대해 베일을 데려오는 것은 바르셀로나와의 경쟁에서 뒤처지지 않는 최고의 방법이라는 판단으로 보입니다.

9천9백만이라..(토트넘 다니엘 레비 회장)

 하지만 분명 베일의 현재 능력이나 스타성 등이 뛰어난 것은 사실이지만 현재 알려져있는 이적료인 9천 9백만 파운드는 표현처럼 '부풀려'져 있다는 생각입니다. 물론 토트넘 회장인 레비의 몸값 올리기가 그만큼 잘 먹혔다고 볼 수 있습니다. 게다가 이번 이적 시장에서 영입해온 선수들이 제법 있으니 이 부분에 대해 메워져야 하는 부분을 생각하면 베일의 천문학적 이적료는 되려 토트넘에게 이득이 될 수 있겠네요.

 베일의 이적설이 처음 수면 위로 올라왔을때 많은 토트넘팬들과 전문가들은 루카 모드리치 사태와 같이 흘러가서는 안된다는 우려의 목소리가 상당히 높았습니다. 당시 토트넘 경기 흐름 전체를 좌우할 정도로 영향력이 지대했던 모드리치였기에 레알 마드리드로의 이적은 토트넘팬들에게는 받아들이기 힘든 일이였을 터입니다. 하지만 정작 이적이 확실시 될때쯤 모드리치는 레알 마드리드로의 이적을 강하게 원하는 인터뷰를 해버렸었죠.

미련없이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했던 루카 모드리치

  모드리치 이적 이후 누가 토트넘의 에이스가 될 것인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지만 베일의 잠재력이 폭발하며 순식간에 토트넘 슈퍼스타로 떠올랐고 왼쪽 수비수로 뛰던 등번호 3번 가레스 베일은 인테르와의 챔피언스 리그 경기에서 마이콘을 지워버리는 대활약으로 토트넘 왼쪽 윙어 등번호 11번으로 바뀌어 있었고 스타 반열에 오르게 됩니다. 결국 스타성과 실력을 함께 갖춘 윙어가 마땅치 않던 레알 마드리드의 레이더망에 걸리게 되며 이번 여름 계속해서 루머를 낳고 있죠. 베일 영입설과 함께 기존 레알 마드리드의 윙어로 활약하던 앙헬 디마리아의 이적설도 떠돌기 시작했습니다.(사실 베일과 디마리아가 공존했을때 하트 세레모니도 겹치니......)
세레모니가 겹치네...쩝.

  베일을 내놓게 될 가능성이 높아진 토트넘은 러시아 리그 안지의 윌리안을 영입하기 위해 엄청난 공을 들였는데요. 이미 토트넘으로의 이적이 확정됐다는 이야기가 나왔기에 토트넘팬들 또한 기대감이 높았습니다. 하지만 러시아 갑부들끼리는 통하나요. 첼시의 구단주인 로만 아브라모비치가 안지 구단주에게 전화를 했다는 소식이 전해지고 이윽고 윌리안이 첼시와 계약을 확정지었다는 기사가 나왔습니다. 그리고 '[오피셜] 윌리안 첼시로 이적'

 시원하게 하이재킹 당하고 맙니다. 보는 이들은 흥미롭지만 당하는 토트넘 입장에서는 속이 터지는 상황이네요.

 어찌됐든 큰 이변이 없는 한 베일이 이적을 하게 된다면 레알 마드리드로 가게 될 가능성이 커졌고 9천 9백만 파운드의 사나이로 세계 최고 몸값으로 기록되겠네요.

2013년 8월 23일 금요일

[스파키의 축구이야기] the Maestro, 지네딘 지단(4)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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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2001년 여름, 역사에 길이 남겨질 사건이 터진다.
당시 최고 이적료인 7500만 유로라는 어마어마한 액수로(4년 계약) 별 모으기에 한창이던 레알 마드리드로 지단이 이적한 것이다.

은하수 군단 역대 최고의 5번

  이름만 들어도 설레이게하는 엄청난 선수들이 영입됐지만 단연 지단이 최고의 영입였다는 평가가 지배적이였고 당시 레알 마드리드의 단장이였던 페레즈의 '신의 한수' 라는 이야기가 될 정도였다.
 그리고 그 효과는 곧바로 데뷔 시즌 바로 나타났다. 지금도 챔피언스 리그 역대 최고의 골장면으로 반드시 등장하는 01/02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보여준 지단의 환상적인 발리슛이 바로 그것이다.
01/02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바이에른 레버쿠젠과의 경기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지단하면 팬들이 떠올리는 한 컷이 바로 이 사진이라고 할 수 있겠다. 당시 호베르투 카를로스의 스로인은 최고로 평가되었고 레버쿠젠을 줄곧 괴롭혔다. 선제골 어시스트가 카를로스의 스로인에서 시작되어 라울의 감각적인 원터치로 기록됐다. 이후 레버쿠젠의 루시우에게 동점골을 내주고 레알 마드리드는 거세게 역전을 위해 몰아부쳤다. 그리고 전반 45분 활발한 오버래핑으로 레버쿠젠 진영으로 2대1 패스로 거세게 돌파해 들어오던 카를로스가 상대 수비수 키를 넘기는 큰 포물선의 크로스(크로스라기엔 좀 애매하나)를 올렸고 레버쿠젠 페널티박스 아크 좌측에서 기다리던 지단이 공의 괘적을 정확하게 재며 발리슛을 시도했다. 결과는 환상적이였다.

환상적인 지단의 발리슛

  레알 마드리드 입단 이래 최고의 골이라고 할 수 있었고 클럽 역사에 남을 골로 지금도 회자되고 있다. 지단의 결승골로 레알 마드리드는 9번째 빅이어(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의 별칭)를 들어올렸다.
 환상적인 첫 시즌을 보낸 지단에게 개인 수상도 쏟아졌다. 프랑스 올해의 선수상, UEFA 올해의 팀,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최우수 선수상, 라리가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 UEFA소속 클럽 올해의 축구선수상 등을 수상하며 데뷔시즌을 화려하게 장식했다.

  시즌이 종료되고 맞이한 2002년 한,일 월드컵. 98년 프랑스 월드컵과 EURO2000 에서 연거푸 메이저 대회 우승컵을 가져간 프랑스 대표팀에 대한 팬들의 기대감과 여론의 관심은 3연속 메이저 대회 우승 여부에 쏠려있었다.
 본선 개막전은 전통적으로 이전대회 우승팀의 차지였으므로 프랑스가 세네갈을 만났다. 결과는 충격적이였다. 프랑스의 0대1 패배. 지단은 부상에 허덕이며 제 역할을 해내지 못했다.
 최종결과 우루과이와 무승부, 덴마크에게 0대2 패배를 맛보며 A조 최하위로 탈락하는 수모를 당한다. 지단의 커리어 중 최악이였던 대회였다.
커리어 중 최악의 대회였던 2002년 월드컵

  조기에 월드컵을 마친 지단은 다음 시즌을 위해 숨고르기에 들어갔다. 이 시즌에 브라질 '축구황제' 호나우두가 팀에 합류한다. 당시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평가받던 호나우두의 합류는 은하수 군단의 완벽성을 더했다.
 좌우에서 루이스 피구, 지네딘 지단이, 호나우두의 바로 아래 트레콰티스타로 라울 곤잘레스가 버티고 있는 공격진은 라리가 최강이라 불렸고 소위 말하는 '지구 방위대' 라는 별명이 생기게 됐다. 알차고 화려한 스쿼드는 리그 우승이라는 결과를 가져왔다. 지단은 리그에서 33경기를 출전 팀의 우승에 일조했다.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4강에서 탈락하며 10번째 우승 타이틀을 차지하는데 실패했다.
 하지만 지단은 FIFA 올해의 선수상, UEFA 올해의 팀에 선정, 수상하는 영광을 안게됐다.

  레알 마드리드에서의 세번째 시즌을 맞이하게 된 03/04 시즌에는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잉글랜드를 대표하던 아이콘인 데이비드 베컴이 레알 마드리드로 전격 이적해오며 갈라티코 1기의 정점을 찍는다. 스타성과 실력을 완벽하게 갖춘 베컴의 영입은 은하수 군단을 더욱 빛나게 만들었다.
지단과 베컴

 베컴의 가세로 레알 마드리드의 미드필드진은 화려함 그 자체를 넘어서게 된다. 하지만 팀 성적은 그리 화려하지 못했다. 리그에서는 발렌시아와 바르셀로나가 각각 우승, 준우승을 차지했고 데포르티보 라 코르냐에게도 밀리며 4위에 머무른다. 국왕컵에서 결승에 오르지만 준우승에 머무르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8강에서 탈락하게 된다. 지단은 레알 마드리드 입단 이래 한시즌 최다 경기 출전을 기록하게 된다.(리그, 컵, 유럽 대항전 포함 50경기)
 개인 수상 또한 계속됐다. 살아있는 위대한 축구 선수 100인, 반세기 최우수 유럽 선수상 등을 수상한다.

 입단 이래 팀 성적이 최저조였지만 시즌이 종료되고 맞이한 EURO 2004에서는 환상적인 기록을 남긴다. 지단은 프랑스 국가대표팀으로써 맞이하는 마지막 메이저 대회가 될것이라 밝혔고 이 대회를 뒤로 국가대표팀을 은퇴할 것임을 시사했다. 본선 조별 예선에서 지단은 독보적인 존재감을 뿜었다. 잉글랜드와의 1차전은 압권이였다.
 2004년 6월 13일, 잉글랜드 서포터 중 한명이 죽은 닭을 경기장에서 내던지며 프랑스가 패배할 것이라며 조롱하고 도발한 가운데(닭은 프랑스 축구협회의 엠블럼이다. 이 사건에 대해 프랑스에서 이의를 제기하자 잉글랜드에서는 되려 비웃으며 '그럼 너희들은 사자를 잡아오면 될 것 아니냐' 라고 반문했다는 일화가 있다.), 전반 38분 잉글랜드의 프랭크 램파드에게 선제골을 내어주고 이렇다 할 모습을 보여주지 못하며 잉글랜드에게 페널티킥까지 내어주었으나 베컴의 페널티킥을 파비앙 바르테즈의 선방으로 막아냈고 경기 종료를 앞둔 후반 인저리 타임 1분.
잉글랜드 문전에서 얻은 프리킥. 베컴은 지단이 키커임을 알고 다급하게 골키퍼와 위치를 조정했고 비장하게 벽을 섰고 지단은 힘껏 감아찼다. 잉글랜드의 골대 왼쪽을 갈랐다. 지단은 미친듯이 포효했다. 포르투갈로 원정응원을 온 프랑스 서포터들의 함성으로 뒤덮혔다.
마법사 지단의 프리킥 골

 그리고 2분 뒤 마법같은 일이 벌어진다.
잉글랜드 페널티 박스를 돌파해 들어가던 티에리 앙리의 발을 잉글랜드 골키퍼 데이비드 제임스가 걸고 넘어지며 페널티킥을 얻어낸 것.
프랑스 서포터 모두가 승리의 쾌재를 불렀고(필자도 승리를 확신했다. 주먹을 불끈쥐고 흔들고 있었다. 프리킥 골에서 이미 흥분 상태.) 지단이 침착하게 키커로 나서 다시 한 번 잉글랜드 왼쪽 아래 그물을 찢어질 듯 때려넣었다. 93분.
 프랑스 선수들 전체가 미친듯이 날뛰며 지단을 끌어안았다. 마법같은 2분이였다.

마법같았던 2분

  이 경기에서 마법같은 승리를 거둔 프랑스는 2승 1무로 조 1위, 잉글랜드는 이 경기에 패하며 2위로 8강에 진출한다. 하지만 프랑스는 그리스의 벽에 부딪혀 패배했고 잉글랜드는 개최국이였던 포르투갈에게 일격을 당하며 드라마같은 경기를 펼친 두 팀이 8강에서 미끄러진다.

  프랑스의 탈락과 동시에 지단은 국가대표 은퇴를 공식 선언했다.
 국가대표를 은퇴하고 맞이한 04/05 시즌, 레알 마드리드는 리버풀의 원더보이 마이클 오웬, 잉글랜드 수비의 핵심이였던 조너선 우드게이트, 로마 통곡의 벽으로 불리던 왈테르 사무엘, 덴마크의 '미친개' 토마스 그라베센을 영입하며 '지구 방위대' 로써의 면모를 굳히고 지난 시즌의 저조했던 성적을 모면하기 위해 최선을 다한다. 또한 한 시즌에 세 명의 감독이 교체되는 황당한 사건도 발생한다.(호세 안토니오 카마초, 마리아노 가르시아 레몬, 반더레이 룩셈부르고)
(좌측부터) 베컴, 피구, 호나우두, 지단, 라울 

 폭풍영입과 세 번의 감독교체에도 불구하고 리그에서는 우승컵을 차지하지 못했다. 국왕컵과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16강에서 미끄러졌다. 1군 스쿼드 전체 선수들의 몸값은 전세계에서 가장 비싼 클럽임에도 불구하고 성적표는 엉망이였다.
 매해 이어져오던 지단의 개인 수상 기록도 이 시즌에 들어서 끊겼다.

  하지만 엉뚱한 시기에 엉뚱한 곳에서 엉뚱한 상황이 벌어진다. EURO 2004까지 별 걱정없이 국제 메이저 대회의 본선에 진출하던 프랑스 대표팀이 2006 독일 월드컵 지역 예선에서 탈락할 위기에 처해진 것이다. 프랑스 여론은 대표팀을 은퇴한 지단, 튀랑, 마켈렐레, 리자라쥐 등을 언급하며 이들의 필요성을 강하게 제기했고 거센 여론을 바탕으로 당시 대표팀 감독이던 레이몽 도메네쉬 감독은 이들에게 대표팀 복귀를 권유하기에 이른다.
 2005년 9월 3일, 파로 제도와의 지역 예선 경기에 지단, 튀랑, 마켈렐레가 프랑스 대표팀에 복귀, 합류하여 3대0 승리를 만들어내는 웃지못할(프랑스 대표팀 입장에선 감격적인) 해프닝(?)이 벌어진다.
 결국 지단, 튀랑, 마켈렐레는 공식 기자회견을 통해 2006 독일 월드컵을 마지막으로 '진짜' 국가대표팀을 은퇴하겠다고 선언했다.

  새 시즌 05/06에는 사무엘, 산티아고 솔라리, 피구 등이 인테르로 이적했고, 오웬은 한시즌만에 잉글랜드 뉴캐슬 유나이티드로 이적하며 팀 스쿼드에 대대적인 변화가 일어났다. 그리고 세르히오 라모스, 호비뉴, 밥티스타, 안토니오 카사노 등 젊고 잠재력이 뛰어난 선수들이 주로 영입된다.
 이전보다 조금은 젊어진 선수들과 함께 시즌을 맞이했고 지단은 이 시즌을 끝으로 현역을 은퇴할 것을 선언했다. 그리고 2006년 1월 세비야와의 경기에서 팀의 4대2 승리를 견인하는 레알 마드리드 입단 이래 첫 해트트릭을 맛본다. 그러나 팀은 또다시 바르셀로나에게 밀리며(호나우지뉴가 무시무시했다.) 2인자에 머물렀고 국왕컵은 4강,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또다시 16강에서 미끄러졌다.
 은퇴를 선언한 지단은 산티아고 베르나베우에서의 마지막 경기인 비야레알전에 나선다. 레알 마드리드의 유니폼에는 'Zidane 2001-2006' 이라는 문구가 새겨져있었다. 후반 21분 3대2로 앞서 나가는 역전골을 기록하고 라울 브라보와 교체되어 나온다. 경기 종료를 알리는 휘슬이 울렸고 지단이 벤치에서 일어나 울음을 애써 참으며 관중들에게 박수를 보냈다. 지단의 가족은 울음을 터뜨렸고 모든 관중들은 지단의 이름과 등번호가 적힌 카드를 들고 카드섹션을 선보였다.

지단의 마지막 홈경기

  클럽 커리어를 마무리지은 지단은 조국 프랑스를 위해 마지막 불꽃을 태우기 위해 독일로 향한다.
 베테랑 트리오의 복귀로 가까스로 독일 월드컵 본선 32강에 오르게 된 프랑스는 G조에서 스위스, 대한민국, 토고와 한 조를 이룬다. 객관적 전력에서 조 1위로 무난히 통과할 것이라는 평을 받던 프랑스는 조별 예선 1차전인 스위스와의 경기에서 보여준 프랑스의 모습은 '느린 축구' 였다. 지단의 플레이메이킹을 중심으로 한 아트사커는 속도 축구의 흐름에는 반하는 그것을 보여주었고 많은 전문가들은 스위스전에 대해 혹평했다. 결과는 0대0 무승부.
 혹평에도 불구하고 2차전 대한민국과의 경기에서도 지단을 중심으로 한 '느린 축구' 는 계속 되었고 그의 동료들은 그의 플레이에 녹아들기 시작했다. 프랑스의 첫 득점이 앙리의 발에서 터졌다. 그러나 박지성에게 일격을 당하며 1대1 무승부를 거둔다. 혹평은 계속됐고 우려는 커져만 갔다.
 그러나 아이러니하게도 3차전 토고와의 경기에서는 지단이 출전하지 않았고 2대0이라는 준수한 스코어로 승리를 거둔다. 여론의 반응은 '역시 플레이메이커의 시대는 갔다.' 였고 전문가들도 이에 동의하는 분위기였다. 1승 2무로 스위스에 이어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한 프랑스.
플레이메이커 시대는 끝??

 16강 상대는 한창 분위기가 물오른 무적함대 스페인. 지단은 주장 완장을 차고 선발로 출전했고 (은퇴를 한 상황이지만) 클럽 및 리그 동료들을 상대로 칼날을 갈았다. 특히나 스페인의 골리는 레알 마드리드의 주전 골리인 이케르 카시야스. 경기가 시작됐고 조별 예선에서 보여준 모습은 온데간데 없이 프랑스는 지단의 템포에 완벽하게 움직였고 다비드 비야에게 페널티킥을 내어주었지만 전반 종료 4분을 남겨두고 프랑크 리베리의 동점골, 후반 38분 패트릭 비에이라의 역전골과 후반 인저리 타임 2분에 지단의 쐐기골이 터지며 3대1로 완벽한 승리를 거둔다.
 8강에서는 9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3대0이라는 굴욕의 스코어를 맛보며 프랑스에게 패한 브라질을 만난다.(2002년 월드컵에서는 프랑스의 조기 탈락) 프랑스 공포증은 계속 됐다. 지단의 프리킥을 앙리가 멋들어진 슛을 터뜨렸고 이 골을 지켜내며 준결승에 진출한다.
 준결승에서 마주친 상대는 EURO 2000에서 지단의 대활약으로 승리를 거뒀던 포르투갈. 옛 동료 루이스 피구를 중심으로 떠오르는 신성 크리스티아누 호날두의 활약으로 많은 주목을 받고 있었기에 쉽지않은 승부가 예상됐다. 슈팅 갯수, 점유율 전반적인 기록에서 밀렸던 프랑스지만 전반 33분 히카르두 카르발류의 파울로 얻어낸 페널티킥을 지단이 득점에 성공했고 이 득점을 지켜내며 대망의 결승전에 진출하며 줄리메 컵(월드컵 우승트로피의 별칭)에 한걸음 다가선다.

 대망의 결승전, 상대는 빗장 수비와 더불어 공격력까지 갖춘 아주리 군단 이탈리아.
프랑스보다 나은 득점력을 선보이며 결승까지 올라온 이탈리아였기에 프랑스에게 있어서는 힘겨운 승부가 될 것으로 예상됐다.(조별예선, 토너먼트 포함 이탈리아 11득점, 프랑스 8득점) 하지만 경기가 시작된지 5분만에 이탈리아의 마르코 마테라찌의 반칙으로 지단이 페널티킥을 차게됐고 결승전 선제골의 중요성은 누구나 알고 있었기 때문에 모두가 긴장하고 있었다. 하지만 베테랑 지단의 배짱은 대단했다. 파넨카킥. 그것도 크로스바를 맞고 골라인을 넘어서고 골대밖으로 튕겨져 나오도록 찬 것이다. 심판은 프랑스의 득점임을 표했고 지단은 아무런 표현없이 그저 여유있게 진영쪽으로 뛰어갔고 동료들은 환한 웃음으로 지단에게 달려왔다. 하지만 12분 뒤 페널티킥을 내주었던 마테라찌가 동점골을 터뜨리며 승부는 원점으로 돌아왔고 스코어는 정규 후반이 종료될 때까지 유지됐고 승부는 연장전으로 돌입한다.
 그리고 사건은 연장 후반 종료 10분을 남겨두고 터지고만다. 볼아웃으로 잠시 경기가 중단되어 모든 선수들이 자신의 포지션으로 돌아가는 도중 지단이 마테라찌의 가슴팍을 머리로 강하게 박으며 넘어뜨린것이다.(마테라찌가 무슨말을 했는지에 대해서는 많은 루머들이 있었지만 지단이 인터뷰를 통해 마테라찌가 자신의 누나를 조롱했다고 밝혔다.) 이때문에 지단은 퇴장 명령을 받았고 심판에게 상황을 설명하며 어필해봤지만 번복은 없었고 경기장을 나가버렸다. 현역으로써 마지막 공식 경기에서 씁쓸한 퇴장을 당하고 만것이다. 경기는 연장 후반까지도 승부가 결정나지 않았고 승부차기에 돌입, 이탈리아는 모든 승부차기를 성공했고 프랑스는 다비드 트레제게가 실축하며 이탈리아가 우승컵 최종 주인이 된다.
결승전 지단의 박치기와 씁쓸한 퇴장

  월드컵이 끝나고 지단의 박치기와 관련된 이야기가 무성했다. 지단의 인터뷰와 마테라찌의 자서전을 통해 사건의 전말은 밝혀졌으나 내용인즉슨 지단의 누이에 대한 모욕적인 말을 마테라찌가 했었고 지단은 이에 대한 보복으로 박치기를 하게 된 것이다. 도리상 마테라찌가 사과를 먼저 해야하는 상황이지만 몇년이 지난 지금까지도 마테라찌는 먼저 사과를 하지 않고 지단에게 박치기에 대한 사과를 요구하며 박치기 사건을 희화화하는 등 팬들의 눈쌀을 찌푸리게 만들고 있다.

레알 마드리드 코치 지네딘 지단

  선수 생활이 끝난 지단은 현재 레알 마드리드의 코치로 카를로스 안첼로티 감독을 보좌하고 있고 수많은 기부활동, 축구 후진국 방문 등을 통해 많은 활동을 하고 있다. 그 중 얼마전 유벤투스, 맨유 등 자신이 속해있던 클럽의 레전드들 간의 경기를 주최하여 여기서 발생하는 수익 전액을 기부하는 등 자선활동에도 힘쓰고 있다.(이 경기를 보며 클래스는 영원하다는 말이 새삼 떠올랐습니다.)



Remembering the Great Maestro, Zinedine Zidane


* the Maestro, 지네딘 지단

* 날지 못하는 네덜란드인, 베르캄프 이야기

2013년 8월 21일 수요일

[스파키 스페셜 리포트] Fall in love with Football, 태국 이야기

ALL COPYRIGHT TO 스파키

  많은 분들이 알고 계시듯 태국인들의 축구사랑은 대단합니다. 연재중이던 지단 이야기는 마무리하지 않고 뜬금없이 태국 이야기를 꺼내는 이유는 이번에 일주일간 교회 단기 선교로 태국을 다녀오면서 직접 피부로 느낀 태국인들의 축구 사랑을 전해드리고 싶어서입니다.

  2013년 8월 12일, 5시간 정도의 비행 후 방콕에 도착한 첫마디는 '대구보다 낫다.' 였습니다.(전 그 유명한 대구에 사는 사람이거든요...ㅠㅠ) 수하물을 챙겨 차를 타고 방콕 시내를 가로질러 가던 중 눈에 띈 것은 클럽 유니폼이였습니다. 열에 다섯 정도는 유럽 축구 클럽(특히 EPL) 유니폼이나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습니다.

  도착 당일 세시간을 자고 아침을 먹은 후 오전 10시에 태국의 큰 공휴일 중 하나인 어머니날 행사에 참여하여 공연을 한 후 태국 북부에 위치한 치앙라이로 가는 버스를 타기 위해 방콕 시외 터미널로 향했습니다. 터미널로 향해 가는 도중 태국의 축구사랑을 또 발견했는데요.

  차를 타고 이동하던 중이라 확대하고 할 여유는 없어 급한대로 찍었는데 방콕 시내에 많은 고층 빌딩들 중 하나에 저렇게 큰 현수막(?)처럼 붙어있었는데 첼시 선수들의 사진이였습니다. 아마도 첼시 스폰서 기업의 건물이 아니였나 싶습니다. 이 사진 찍다가 지나가버려서 놓쳤답니다.

  저녁 8시 30분에 태국 북부에 위치한 치앙라이로 가기 위해 버스에 몸을 실었죠. 무려 12시간이라는 긴 시간을요. 저희 교회와 함께 치앙라이의 교회에 갈 다른팀이 머문 리조트에서 아침을 먹은 후 산책을 하던 도중 리조트 담벼락 바로 밖의 상점 벽에 바르셀로나 선수들의 사진이 있더군요.
이렇게요.
 축구사랑의 흔적은 900km가 떨어진 치앙라이에서도 이렇게 발견할 수가 있었습니다.

 12시간을 달려 도착한 치앙라이에서 다시 1시간 반을 달려 도착한 곳은 산족 마을 뽕끌랑남이였습니다.
정말 먼 거리에서도 나무 한그루가 다 보일 정도로 청정한 지역입니다.

  역시 산족 마을에도 축구사랑은 예외가 아니였습니다. 첼시, 맨유, 바르셀로나 등 유럽 클럽들의 유니폼을 입은 아이들이 제법 많이 보였고 트레이닝복을 입은 아이들도 간혹 보였습니다.(유니폼의 경우 이미테이션)
  치앙라이에서 맞이한 두번째날(2013년 8월14일)에는 지역 학교에 방문하여 공연을 하게됐는데 공연 후 아이들에게 선물을 전달하는데 선물에는 축구공들이 있었고 아이들의 반응이 정말 좋았습니다.


  그리고 이날 저녁 아주 특별한 인연을 맺게 되었는데요. 이곳 산족 마을 아이들 중 하나인 15세 소년 '밧' 이라는 아이였습니다.
잘 생겼죠??

저랑 같이 셀카 한방!

  축구 선수가 꿈인 이 친구는 레크레이션을 할때부터 제 눈에 계속 띄었고 저녁 청소년 집회가 끝날때 쯤에는 밧의 꿈을 이루는데 도움이 되고 싶다는 생각이 들어 틈날때마다 후원을 해주기로 마음을 먹었습니다.

  2013년 8월 15일, 치앙라이 뽕끌랑남에서의 모든 일정이 끝나고 치앙라이 시내의 온천욕을 마치고(산족 마을에는 물이 제대로 안나오므로 씻는게 힘이 들어요..) 우리나라의 대형 할인마트와 같은 곳인 Big C라는 곳에 저녁을 먹기 위해 들렀습니다.

삶은 닭가슴살과 볶음밥, 저기 보이는 국물은 삼계탕 국물이랑 비슷했어요.

요건 전통요리인 파타이입니다. 잡채랑 비슷한데 새우와 국수를 같이 볶은거에 숙주나물이 같이 있는데 맛이 독특하면서도 입맛이 맞더라구요.

  갑자기 음식 사진이 나왔는데 음식 소개는 아니구요. 저녁 식사를 마치고 잠시 매장을 둘러보는데 역시나 축구사랑은 여기도 빠지지 않습니다.
캐쥬얼하게 입을 수 있게 디자인 된 옷들
(나이키나 아디다스에서 공식적으로 생산된 옷은 아니였습니다.)

맨유와 리버풀

  방콕과 같은 도회지와 비교했을때 경제적 수준이 조금 낮아서 그런지 공식 생산 업체보다 이미테이션 내지 캐쥬얼한 옷에 클럽 엠블럼이 부착되어 나오는 옷들이 저렴한 가격에 나와있었습니다.

  그리고 방콕으로 가기 위해 치앙라이 공항에서 박지성, 윤석영 선수의 소속팀으로 유명한 QPR 구단주의 소유 항공사인 Air Asia 비행기를 타게됐습니다. 내심 박지성 선수의 흔적을 찾고 싶었지만 없었습니다.
 하지만 대박 사건이 하나 터졌습니다. 제 바로 앞자리 줄부터 태국 프리미어 리그 소속 축구 클럽인 치앙라이 유나이티드 선수단이 타고 있었던겁니다. 탑승하고 나서는 몰랐지만 방콕에 착륙하여 내리기 위해 서 있는 동안 오렌지 색에 Chiangrai United FC 엠블럼이 새겨진 티셔츠를 입은 사람들이 많은 것을 확인한 저는 제 바로 앞자리에 서있던 외국인(코치처럼 보였습니다.)에게 조심스럽게 말을 걸었고 네덜란드인임을 확인하고 곧바로 한국에서 왔다고 얘기를 했습니다.
 곧바로 눈빛이 바뀌며 'Guus Hiddink?' 라고 반문했고 저도 반갑게 대답하며 그때 정말 최고였다며 담소를 나눴습니다. 자신은 팀에 합류한지 얼마 안됐다고 하더군요. 비행기에서 내려야 하는 상황이라 정신이 없어 사진 찍을 생각도 못하고 걸어가는데 함께 동행한 선교사님께서 치앙라이 유나이티드 봤냐고 물으시길래 아차 싶어 수하물 내리는 곳에 갔더니 선수단과 함께 서있는걸 발견하고 함께 사진을 찍었습니다.
치앙라이 유나이티드 FC Henk Wisman 감독과 함께

  한국에 돌아와서 구글링을 해보니 올해 7월에 치앙라이 유나이티드 FC의 감독으로 부임했고 2005년에 아르메니아 국가대표 감독을 시작으로 네번째 팀이라는 걸 알았습니다. 치앙라이 유나이티드는 태국 프리미어리그에서 18개 팀 중 16위에 머물러 있네요. 아무래도 저조한 성적으로 기존의 감독이 물러나고 Henk Wisman 감독이 부임한듯 합니다.

  생각지 못한 큰 수확(?)을 거두고 방콕 시내 외곽의 호텔에서 하루를 마무리하고 다음날 오전에 사파리를 갔다가 동양 최대 종합 쇼핑몰인 메가 방나(Mega Bangna)에 방문했습니다.(근래에 태국 방콕을 다녀오신 분이라면 한 번 정도 들러보셨을거라 생각됩니다.) 메가 방나에는 우리나라 대형 할인마트 중에서도 규모가 큰 마트정도 규모가 5~6개가 있고 네덜란드 회사인 이케아에서 운영하는 초대형 쇼핑몰이 위치해 있는 일종의 쇼핑 구역과 같은 곳입니다. 동양 최대 종합 쇼핑몰이 태국에 있다는게 조금은 아이러니하기도 하지만 확실한 것은 태국이 막연히 후진국이라는 인식이 깨지게 됐습니다. EPL의 빅클럽들도 태국을 방문하여 경기를 많이 했고 박지성 선수의 경우 자선 경기를 매번 태국에서 가지기도 하죠. 그만큼 태국은 잠재력이 뛰어난 국가라고 봐야겠습니다.

  저는 축구 전용 매장에 두군데를 들러봤는데요. 가격대는 수입 공산품이라 전혀 우리나라 가격과 차이가 없었습니다. 레알 마드리드 지난 시즌 유니폼의 경우 40% 세일을 진행중이라 4~5만원 가량 저렴하게 구매가 가능했습니다. 물가가 마냥 우리나라보다 낮다고만 볼 수 없는 대목이죠. 축구화는 오히려 더 비싼 경우도 있었구요.
세계 각종 브랜드의 축구화가 쭉 진열되어 있었구요.


포르투, 보카 주니어스 등 국내 오프라인 쇼핑몰에서도 잘 없는 유니폼을 제법 많이 판매하고 있었습니다. 판매가 안된다면 내어놓을 이유가 없는데 찾는 수요가 있으니 그만큼 축구 자체에 대한 관심도가 높다고 볼 수 있겠죠.

역시나 첼시 유니폼도요.

할인중이던 레알 마드리드 홈 유니폼

  산골 마을이든 도회지든 가릴 것 없이 누구나 축구 유니폼, 트레이닝복을 입고 있었을 뿐만 아니라 축구 자체에 대한 관심도가 굉장히 높다는 것을 많이 느낄 수 있었습니다. 본래의 방문 목적은 선교였는데 더불어 함께 태국인들의 축구 사랑을 발견한 것은 저에게 알차고 알찬 태국 단기 선교 기간이 아니였나 싶네요.

2013년 8월 2일 금요일

[스파키의 축구이야기] the Maestro, 지네딘 지단(3)

  1996년 여름 지단은 유벤투스로 전격 이적한다. 유벤투스가 유럽의 챔피언이 된 직후 입단이라 여론의 많은 관심을 받았다.

유럽 챔피언 유벤투스로 입단한 지단

 그리고 95/96 시즌 코파 리베르타도레스(UEFA 챔피언스 리그와 같은 성격의 대회) 우승팀 아르헨티나의 리베르 플라테와 인터콘티넨탈 컵에서 UEFA 챔피언스 리그 우승팀 자격으로 참여해 경기한 결과 1대0으로 승리하며 입단 이후 첫 우승 트로피를 차지한다.
 유벤투스에서의 첫 시즌 41경기에 출전하며 7득점을 기록한다.(리그 29경기 출전) 무난한 첫 시즌과 함께 팀은 AC밀란 유니폼에 새겨진 스쿠데토(세리에A 우승팀에게 주어지는 심볼의 명칭)를 빼앗아온다.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는 결승전까지 올랐으나 독일의 보루시아 도르트문트를 만나 3대1로 패배하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무른다. 지단은 챔피언스 리그에 10경기를 출전해 2골을 기록한다. 시즌이 끝나고 지단은 세리에A 최우수 외국인 선수상을 수상하며 첫 시즌에 두 개의 우승컵과 한 개의 개인상을 차지, 화려한 첫 시즌을 마무리했다.

유벤투스에서의 첫 시즌

 두번째 맞이한 시즌에는 총 48경기에 출전하며 11득점을 했고 이 중 리그에서 32경기 출전 7골을 기록하며 유벤투스는 지난 시즌에 이어 스쿠데토 방어에 성공한다. 하지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 2년 연속 진출했지만 스페인의 레알 마드리드를 만나 1대0으로 석패 또다시 준우승에 머무른다.

97/98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 지단

 시즌이 끝나고 맞이한 1998년 여름. 고국 프랑스에서 열린 월드컵에 대표팀으로 발탁된다. C조에 속한 프랑스는 3전 전승에 단 1실점만을 기록하며 조 1위로 16강에 진출한다. 조별 경기를 거치면서 프랑스 대표팀이 구사하는 축구에 대한 여론의 관심은 폭발했고 많은 사람들은 예술적인 경기를 보여준다하여 '아트사커' 라 불렸고 그 중심에는 등번호 10번 지네딘 지단이 존재한다는 사실이 부각되기 시작했다. 간결한 드리블과 퍼스트 터치, 최소한의 움직임으로 상대를 속이는 개인기는 지단 특유의 움직임이 되었고 일명 '마르세유 룰렛' 이라는 기술이 탄생하기에 이른다.
 16강과 8강을 연장전과 승부차기의 혈투 끝에 통과했고 4강에서는 대회 다크호스로 불리던 크로아티아의 돌풍을 잠재우며 결승전에 오른다. 그리고 8강 승부차기에서 기록한 페널티킥이 득점의 전부였던 지단이 폭발한다.
 이전 대회였던 94년 미국 월드컵 우승팀이였던 브라질이 2연속 대회 우승을 노리며 결승전에 올라왔다. 유럽에서 한창 주가를 올리던 브라질의 호나우두는 총 네 골을 기록하며 팀을 결승전에 올려놓는데 큰 역할을 했고 결승전에서의 기대감 또한 컸다.
 토너먼트 중 두번의 경기에서 연장전과 승부차기를 경험한 프랑스는 전반적으로 체력이 처져있는 상황이였다. 그리고 결승전이 시작됐다.

 '마에스트로' 지단의 조율이 중심이 된 프랑스는 브라질 진영을 숨막히게 했다. 지단은 유리 조르카예프, 스테판 귀베와 함께 브라질 수비진을 초토화시켰다. 브라질은 이렇다 할 손을 써보지 못한 채 릴리앙 튀랑, 마르셀 드사이, 비상트 리자라쥐, 프랑크 르뵈프가 이루는 철의 벽에 번번히 막히며 득점에 실패한다.
 그리고 전반 27분과 45분(인저리 타임 1분) 얻은 코너킥을 지단이 헤딩으로 모두 넣으며 2대0으로 전반을 마쳤고 후반전에 넘어와서도 브라질은 힘을 쓰지 못한채 경기 막판 인저리타임 3분에 엠마누엘 프티가 골을 넣으며 승부의 쐐기를 박았고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좀처럼 감정표현이 없는 지단은 포효하며 주먹을 불끈쥐었고 프랑스 축구천재로 불렸던 미셸 플라티니는 관중석에서 벌떡 일어나 관중들과 함께 소리치며 박수를 보냈다.(미셸 플라티니도 선수 시절 유벤투스에서 활약했다.)
 그와 더불어 월드컵 결승전 최우수 선수로 선정됐고 월드컵 올스타 베스트 일레븐에 이름을 올리게된다. 그리고 UEFA 클럽 최우수 미드필더 상, FIFA 선정 올해의 선수상, 발롱도르, 세계 올해의 축구 선수상, 르큅 선정 최고 선수상, 올해의 프랑스 최우수 선수 상을 수상하는 등 전세계 축구팬들에게 지단이라는 이름을 각인시키는 계기가 되었고 '아트사커' 열풍을 불러일으켰다.

98년 월드컵 결승전

 프랑스 월드컵 이후 두 시즌간 총 81경기에 출전, 명실공히 유벤투스의 에이스로 자리잡았고(1999년 20세기 가장 위대한 축구선수 100명에 선정된다.) 99/00 시즌이 끝난 여름 벨기에와 네덜란드가 공동개최하는 EURO 2000에 프랑스 대표팀으로 출전한다. 많은 여론이 프랑스가 월드컵 우승의 기세를 몰아 EURO 2000에서도 우승컵을 가져갈 수 있을지에 대해 큰 관심을 가졌다. 98년 월드컵 결승전에서 엄청난 활약을 보여준 지단이 또다시 활약할지에 대한 관심은 자연스레 커졌다.
 D조에서 네덜란드에게 1패를 기록하고 나머지 두 경기에서 승리를 거둬 조 2위로 8강 토너먼트에 진출한 프랑스는 무적함대 스페인을 만났고 지단이 선제골을 터뜨렸고 6분 뒤 스페인의 멘디에타가 페널티킥을 성공하며 동점을 이루었으나 전반 44분 조르카예프가 역전골을 터뜨렸고 이를 지켜 2대1의 스코어로 가까스로 4강에 진출한다.
 4강에서는 황금세대를 맞이한 포르투갈을 상대로 연장혈투에서 연장 후반 종료 7분을 남겨둔 시점에 포르투갈의 반칙으로 페널티킥을 얻었고 지단이 득점에 성공 골든골로 결승에 진출한다.

4강 포르투갈과의 경기에서 골든골로 연결된 페널티킥

 결승에 오른 프랑스는 두개 메이저 대회 연속 우승의 부푼 꿈을 안고 경기에 임했다. 하지만 빗장 수비의 명성은 대단했다. 전반 내내 이탈리아는 프랑스의 공격을 차단해내는데 성공했고 양쪽 모두 소득없이 후반전에 돌입한다. 그리고 후반 시작 10분만에 이탈리아의 델베키오에게 선제골을 내줬고 후반이 45분이 다 끝나고 프랑스 서포터들은 우승컵이 멀어졌다고 생각하고 있었다. 그러던 찰나에 후반 인저리 타임 4분에 당시 아스날에서 활약중이던 실뱅 윌토르의 극적인 동점골이 터졌고 승부는 연장전으로 이어졌다. 그리고 연장 전반 13분, 좌측에서 돌파해 들어온 로베르 피레스의 낮은 크로스를 다비드 트레제게가 지체없이 왼발로 찬 슛이(시속 81km였다고 한다.) 이탈리아의 골망을 가르며 경기가 끝이 난다. 끝내 월드컵에 이어 EURO 2000마저 우승을 차지하며 프랑스의 시대임을 다시 한 번 확인시킨다.
 더불어 지단은 FIFA 올해의 선수상, UEFA EURO 최우수 선수상 등을 수상하게 된다.

두 개의 메이저 대회 우승컵을 연속으로 거머쥔 지단

 EURO2000 우승을 뒤로하고 맞이한 00/01 시즌 역시 유벤투스의 핵심 미드필더로써 활약하며 39경기에 출전한다. 이 시즌에 있었던 UEFA 챔피언스 리그에서 지단의 그 유명한 박치기가 시작됐다. 조별 리그 경기 중 독일 함부르크SV와의 경기에서 상대 센터백(조첸 키엔츠)과 실랑이를 벌이던 도중 지단이 머리로 박치기를 해 퇴장당한다. 그리고 팀은 1승 3무 2패라는 초라한 기록을 조 최하위로 탈락하게 된다. 리그에서는 AS로마에 승점 2점이 뒤처지며 아쉽게 준우승에 머무른다.

 유벤투스 소속으로 보낸 5년 사이 프랑스에서 갓 벗어나 프로 생활을 하던 청년 지네딘 지단은 세계 축구를 뒤흔드는 월드클래스 미드필더가 되었고 2001년 여름 수많은 클럽들의 러브콜을 받게된다.

 그리고 스페인 최고의 명문 클럽인 레알 마드리드가 당시 축구계에서의 최고 이적료인 7천 5백만 유로라는 어마어마한 금액을 제시했고 유벤투스는 이를 수락한다.
 유벤투스에서 너무도 많은 것을 이룬 지단은 스페인이라는 새로운 무대에 진출하는데 흥미를 느꼈고 역시 이적에 동의했다.

 '지구방위대' 레알 마드리드의 일원으로 합류하게 된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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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the Maestro, 지네딘 지단
1편 2편

* 날지 못하는 네덜란드인, 베르캄프 이야기
 1편 2편 3편

2013년 7월 25일 목요일

[스파키의 풋볼이슈] 빵빵터지는 맨시티와 나폴리

  이번 이적시장에서 가장 죽쑤고 있는 EPL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와 아스날을 비웃듯 날이면 날마다 오피셜을 '빵빵' 터뜨려주는 두 클럽이 있습니다.

 맨유의 연고지 라이벌인 맨체스터 시티(이하 맨시티)와 이탈리아 세리에A의 S.S.C 나폴리인데요.(두 팀 모두 하늘색 유니폼과 이번에 새로운 감독들이 왔다는 공통점!)

 맨체스터 더비로 늘 맨유보다 뒤진다는 이미지가 강했던 맨시티는 만수르의 자금력을 등에 엎으면서 서서히 맨유를 추격해왔는데요. 결국 11/12 시즌에는 마지막 라운드에서 맨유를 제치고 극적인 역전 우승을 거두며 창단 이후 첫 프리미어리그 우승을 이뤘습니다. 하지만 지난 시즌 맨유에서 아스날의 골게터였던 로빈 반 페르시(Robin van Persie)를 영입하며 막강한 공격력을 앞세워 우승컵을 탈환해왔습니다.

 반 페르시라는 '신의 한수'는 치명적이였다고 볼 수 있는데요. 하지만 이번 여름 이적 시장은 정반대가 된듯 합니다. 영입하려는 선수마다 하이재킹당하며 번번이 놓치고 게다가 집안 단속마저 안되며 팀의 아이콘인 웨인 루니(Wayne Rooney)마저 팀을 떠나려고 하는 맨유에 반하여 맨시티는 이적 시장이 열림과 동시에 우크라이나의 샤흐타르 도네츠크에서 뛰던 브라질 미드필더 페르난지뉴(Fernandinho)를 3천만 파운드를 지불, 영입하며 쾌조의 스타트를 끊었습니다. 무게감이 상대적으로 떨어지던 중앙 미드필드진을 대거 보강하게 됐네요.

3천만 파운드의 사나이

 이때 맨유는 스페인의 바르셀로나 소속 중앙 미드필더인 티아구 알칸타라(Thiago Alcantara)를 영입하는데 총력을 기울였는데요. 영입에 거의 가까워지던 찰나에 독일 바이에른 뮌헨에 부임한 전 바르셀로나 감독인 과르디올라의 한마디에 알칸타라가 급선회하며 놓칩니다. 그리고 맨시티는 곧바로 세비야로 레이더망을 돌려 스페인 특급 윙어인 헤수스 나바스(Jesus Navas)를 2천만 파운드에 전격 영입합니다.

생애 첫 국외 무대에 진출한 헤수스 나바스

 맨유는 알칸타라를 대신해 영입하려던 네덜란드 PSV아인트호벤의 케빈 스트루트만(Kevin Strootman) 마저 이탈리아의 AS로마에게 빼앗기며 또다시 땅을 치게되는데요. 맨시티는 이를 비웃듯 세비야에서 주포로 빼어난 활약을 하며 스페인 국가대표에서도 주전을 꽤찬 알바로 네그레도(Alvaro Negredo)를 2천4백만 파운드에 데려왔고 곧바로 이틀뒤에는 이탈리아의 피오렌티나로부터 2천7백만 파운드에 영입했다는 공식 기사를 터뜨립니다.

왼쪽부터 네그레도, 요베티치, 나바스(후덜덜하네요.)

 이로써 맨시티는 카를로스 테베즈(Carlos Tevez)의 유벤투스행이 전혀 허전하지 않은 공격력을 갖추게 됐습니다. 에딘 제코(Edin Dzeko), 세르히오 아게로(Sergio Aguero)라는 '한 방'이 있는 두 선수와 네그레도의 무게감과 요베티치의 스피드가 더해지며 루니와의 불안한 동거를 이어가는 맨유(정확히 말하면 모예스 감독)와는 대조적인 행보를 보이고 있습니다. 게다가 바르셀로나의 세스크 파브레가스(Cesc Fabregas)를 영입하기 위해 총력을 기울이고 있으나 번번히 거절당하고 있는 맨유이기에 이적시장에서의 맨체스터 더비가 현재까지는 맨시티쪽으로 많이 기울어져 있어 보입니다.


  다음은 S.S.C 나폴리입니다. 나폴리 득점의 대부분을 책임지던 주포 에딘손 카바니(Edinson Cavani)가 신임 감독 라파엘 베니테즈(Rafael Benitez)가 그토록 막던 첼시가 아닌 프랑스의 PSG로 이적하며 받은 이적료는 자그마치 5천5백만 파운드!!!

 맨시티가 페르난지뉴와 나바스를 영입하는데 들어간 비용보다 5백만 파운드가 더 많은 수치인데요. 덕분에 베니테즈는 편안한 마음으로 이적시장에서 장을 보고 있습니다.(표현이 좀... 저렴한가요??)
으흐흐. 카바니 고마워.

 그 첫번째 작품은 레알 마드리드에서 준수한 활약을 보여준 호세 카예혼(Jose Callejon)입니다. 지난 시즌 주제 무리뉴 체제에서 제법 많은 시간을 출전하며 마드리드에 남아있을거라 예상됐으나 새로 부임한 카를로 안첼로티의 눈에는 들지 못했나봅니다. 베니테즈가 카예혼을 영입하며 미드필드 전 지역을 뛸 수 있는 자원을 확보했습니다.

제가 카예혼입니다.

 나폴리는 멈추지 않고 레알 마드리드에서 좁아진 입지에 처해있던 라울 알비올(Raul Albiol)을 영입하며 상대적으로 취약하던 수비진을 보강합니다. 2연속 마드리드산 꿀영입으로 스페인에서의 장은 마치는가 했습니다.

좋아요!!!

 하지만 이에 만족하지 못하고 결국 곤잘로 이과인(Gonzalo Higuain)을 3천2백만 파운드에 빼오며 공격수, 미드필더, 수비수 한 명씩을 각각 마드리드에서 완전이적시켜오는데 성공합니다. 아스날이 그토록 원하던 이과인을 놓치는 순간입니다. 마드리드에서의 출전시간 자체가 부족했을뿐 경기에 나올때마다 한 방을 터뜨려줬기때문에 꾸준한 출전시간만 주어진다면 카바니의 공백을 무난하게 메워주리라 생각됩니다.

로마의 나폴리팬들로부터 엄청난 환영을 받는 이과인

 그리고 베니테즈가 긴 시간 머물던 리버풀의 골키퍼인 호세 레이나(Jose Reina) 임대 영입 소식을 이과인과 같은 날 공식 발표합니다. 지난달 리버풀에 영입된 벨기에 국가대표 골키퍼인 시몽 미뇰레(Simon Mignolet)가 영입됐고 레이나의 입지에 대한 이야기가 많았는데요. 결국 브랜든 로저스 리버풀 감독은 미뇰레를 주전 골리로 내세우기로 결정을 했나봅니다. 사실 개인적으로 잔실수는 간혹 있더라도 레이나를 주전으로 세우는게 안정감이 있어보이는데요. 그래도 레이나를 임대이적시켰다는 것은 미뇰레를 한 시즌정도 세워보고 난 뒤에 결정하겠다는 심중으로 보입니다. 레이나에게는 조금 아쉬우면서 씁쓸한 임대이적이 아닐까 싶습니다.

내가 밀려나다니...!!

 살펴보다 보니 두 팀의 공통점은 거침없는 영입과 더불어 스페인 출신 선수들을 많이 영입했다는 점인데요. 무려 다섯명이 스페인 출신이니 올해도 역시 '믿고 쓰는 스페인산'은 계속되네요. 게다가 이과인은 아르헨티나 출신이니 스페인어를 구사하니 나폴리는 이적생들끼리는 의사소통에 전혀 문제가 없어보입니다. 감독도 스페인 출신이네요.

 스페인 출신의 실력파 선수들이 또 얼마나 더 이적할지 지켜보는 것도 올여름 이적시장의 관전 포인트가 되겠네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