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3월 15일 금요일

[스파키의 축구 이야기] 헤이젤 참사, 훌리건의 암흑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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헤이젤 참사

  1985년 5월 29일 유러피언컵 결승전이 열린 벨기에 브뤼셀의 보두앵 경기장에서 이탈리아 세리에A 유벤투스FC와 잉글랜드 리버풀FC 서포터 사이에 벌어진 싸움으로 인해 39명이 사망하고 454명이 부상당한 사건이다. 난폭하기로 유명했던 리버풀FC의 더 콥과 역시 만만치 않게 거칠기로 유명했던 유벤투스FC의 울트라(이탈리아에서 난폭한 서포터들을 일컫는 훌리건과 같은 개념) 간의 다툼이였기에 문제는 더욱 심각했다.



  사건의 발단은 당시 영국의 훌리건들이 유럽 대륙에 자신들의 세를 과시하려던 욕구와 이탈리아를 중심으로 한 주변국들의 난폭한 서포터들을 가리키는 울트라들의 미묘한 라이벌 의식으로 인해 1984년 리버풀FC의 팬들이 유벤투스FC의 팬들에게 집중구타당하는 사태가 벌어지며 시작되었다. 그리고 1년 후, 유러피언 결승전이 공교롭게 리버풀FC와 유벤투스FC 간의 경기가 성사되었고 리버풀FC의 더 콥은 치를 떨며 복수를 준비한다. 그리고 킥오프 한 시간 전, 경기의 분위기가 절정에 다다를때 쯤 경기장 한편의 무려 7m나 되는 콘크리트벽이 붕괴되었다. 유벤투스FC의 울트라들이 리버풀FC의 더 콥에게 무엇인가를 던지며 욕설을 했고 이에 분개한 더 콥 중 일부 훌리건들이 준비한 쇠파이프와 흉기를 들고 펜스를 넘어 중립지역을 지나 유벤투스FC 울트라의 관중석을 덮쳤다. 이러한 갑작스런 사태로 일반 관중들은 황급히 빠져나가기 위해 순식간에 출구로 몰렸고 이에 7m의 콘크리트 벽이 버텨내지 못한채 무너져 버린것이다.
                                                                            
쇠파이프와 흉기로 유벤투스 관중석을 향해 가는 리버풀FC의 훌리건들

   관중석을 덮친 리버풀FC의 훌리건들은 유벤투스FC의 울트라들 뿐만 아니라 일반 관중들에게도 폭력을 행사했고 순식간에 아수라장이 되었다. 콘크리트 벽이 무너지며 일부 관중이 압사당하고 스텐드에서 떨어지며 부상을 당하거나 사망하게된다. 사태는 가까스로 진정되었고 경기는 시작되었다. 정신없이 진행된 경기는 미셸 플라티니의 골로 유벤투스FC가 승리하며 우승컵을 가져갔다. 그러나 당시 아수라장이였던 경기장에서 경기를 하던 선수들은 멀쩡한 상태에서 경기를 가질 수 없었다. 그 당시 경기를 뛰었던 선수들의 생생한 증언은 얼마나 긴박했고 참혹했던 상황이였는지 잘 알 수 있다.



 이안 러쉬(Ian Rush) 당시 리버풀FC 공격수
  “참사가 벌어진 후의 경기 내용들은 아무것도 아니였습니다. 페널티 박스 바깥에서의 파울이였으나, 심판은 페널티킥을 지시했고 플라티니가 득점했습니다. 그러나 이러한 오심은 피치 바깥에서 일어난 일과는 상관이 없었어요. 그 경기에 뛴 선수들, 유벤투스 선수들에게 물어봐도 대답은 동일할겁니다. 유러피언 컵 결승이라기보다는 그냥 경기였죠. 모두들 ‘빨리 끝내고 우리 가족들이 무사한지, 다른 사람들이 무사한지 보러가야 해.’ 이런 생각들을 했을겁니다.”


 케니 달글리쉬(Kenny Dalglish) 당시 리버풀FC 공격수, 전 리버풀FC 감독
  “몇몇 리버풀 팬들이 저지른 일은 용납하기 어렵지만, 상대방 서포터들이 계속해서 무엇인가를 던져대면 가만히 참고 있기란 당연히 힘든 일입니다. 1년 전에도 돌에 맞아서 심하게 아파본 사람이라면, 다시는 그렇게 던지도록 놔두지 않을겁니다. 그렇게 비극이 시작된 것이죠. 우리는 이탈리아 팬들이 우는 것을 보았고, 그들은 우리가 호텔을 떠날 때 우리 버스를 때려댔어요. 우리가 브뤼셀을 떠날 때 이탈리아인들은 화가 나 있었죠. 충분히 이해할 만한 것이었습니다. 39명의 동포들이 죽었으니까요. 수많은 경찰들이 버스를 보호해야만 했습니다. 저는 어떤 이탈리아인을 아직도 기억하고 있습니다. 그는 제가 앉아있는 창가로 얼굴을 향하고 있었습니다. 그는 비명을 지르고 울고 있었죠.”


 필 닐(Phil Neal) 당시 리버풀FC 수비수, 주장
  “리버풀이나 유벤투스에겐 잘못이 없습니다. 제가 항상 해온 말이지만, 제대로 된 조사조차 이루어지지 않았습니다. 저는 도대체 누가 거대한 두 클럽이 붙는 유러피언 컵 결승에 그런 부적당하고 낡아빠진 경기장을 선정했는지 알고 싶습니다. 분명히, 바르셀로나도 개최할 능력이 있었고, 베르나베우에서도 열릴만한 경기였는데, 도대체 왜 그런 스타디움에서 열린 것일까요?”
리버풀FC의 훌리건들의 무차별적 폭력 행위로 아수라장이 된 경기장

 ⇒ 이 사건으로 훌리건 29명이 구속되었고 이 사건으로 인해 잉글랜드의 클럽팀이 5년간 국제 대회 출전을 금지당한는 중징계를 받는 등(리버풀FC는 7년간 출전 금지 처분을 받음) 잉글랜드 축구의 서포터 문화에 큰 변화를 가져온 사건중 하나이다.

헤이젤 참사의 참혹했던 당시 현장

      ⇒ 1984년 유벤투스 팬들이 리버풀 팬들을 일방적으로 폭행한 삐뚤어져버린 라이벌 의식, 그에 대해 똑같은 폭력으로 복수한 리버풀FC 훌리건들의 폭력성, 잘못된 경기장 선정으로 뭇매를 맞게된 유럽축구협회의 실수가 불러일으킨 참사였다.








2013년 3월 14일 목요일

[스파키의 축구이야기] 12/13 챔피언스 리그 8강 확정과 EPL의 암흑기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경기 종료 휘슬이 울렸다.

2-0 깔끔한 원정팀 아스날의 승리였다.

그런데.

홈팀 바이에른 뮌헨 선수단은 웃으며 환호를 지르고 서포터들은 박수치며 소리를 질렀다.

반면 원정팀 아스날 선수단은 고개를 숙였고 스페인산 조율사 아르테타는 쓰디쓴 표정으로

왼쪽 팔뚝에서 주장 완장을 뺐다. 그리고 원정을 온 거너스(아스날의 애칭)들은 아쉬움으로 

멍한 표정으로 허공을 응시하고 있었다.

원정 다득점 원칙에 의해 뮌헨이 원정에서 3-1 승리.
아스날은 알리안츠 아레나에서 2-0 승리.

합계 3-3의 동률이지만 원정 다득점 우선원칙으로 인해 아스날의 탈락이 확정됐다.

최후의 EPL 클럽이였던 아스날마저 탈락하면서 17년간 이어지던 EPL 클럽의 UEFA 챔피언스 리그(이하 챔피언스 리그)8강 진출이 물거품이 되었다.

공교롭게도 알리안츠 아레나는 지난 시즌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이 열렸고 이곳에서 EPL 클럽인 첼시FC가 우승컵을 들어올렸었기에 더욱 뼈아플것이다.(첼시는 지금 유로파 리그에....;;)

거너스의 서포터가 아니더라도 EPL 서포터들과 잉글랜드인들에게는 충격과 같은 사건일 터다.

이 대목에서 원정 다득점 우선 원칙에 대해서 논하는 것은 바보같이 제 얼굴에 침뱉기 밖에 되지 않기에 다루고 싶지 않다.

최근 10년간의 빅이어(챔피언스 리그 우승컵의 애칭)를 한 리그에서 쓸고 간 경우는 FC 바르셀로나(이하 바르샤)를 제외하면 EPL이 유일하다.(리버풀FC,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첼시FC)

바르샤가 대단하지만 이보다 더욱 무서웠던 것은 늘상 16강, 8강, 4강 대진표에서 EPL 클럽 간의 경기가 수시로 펼쳐져서 EPL이 챔피언스 리그를 정복했다라고 해도 과언이 아닐 정도였다.

더더욱이 EPL 클럽이 우승하지 못한 시즌에는 우승팀의 결승 상대가 10년 간의 시즌 중 5시즌이 EPL 클럽이였으니 더이상 EPL이 챔피언스 리그를 정복했다는 말에 이의를 제기할 만한 사람은 없을 것이다. 결과가 모든 것을 대변하기 때문이다.

빅이어의 지난 10년 간 각 주인들은 리그가 매번 다르다.
정확히 03/04 시즌의 포르투를 제외하면 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 이 세 개 리그가 번갈아가며 빅이어를 가져갔다.

주기로만 따지면 이탈리아가 차지할 차례이긴 하다. : )

그런데 이번 8강 대진표에 보기 드문 클럽들이 자리를 잡았다.

EPL의 암흑시즌인데 반해 스페인이 무려 세 자리를 가져갔고, 독일이 두 자리, 나머지 세 자리를 프랑스, 터키, 이탈리아가 각각 가져갔다.

한때 포르투갈 황금 세대 폭격기였던 파울레타로 대변되던 PSG가 한참만에 8강 대진표에 이름을 올렸고, 드로그바와 스네이더 효과를 톡톡히 보면서 치고 올라온 갈라타사라이, 부자 구단주를 만나면서 급작스럽게 강호로 떠오른 말라가는 8강 대진표에서 근래들어 발견하기 힘들었던 클럽들이다.

8강 대진이 발표되고 뚜껑을 열어보기 전까지는 모르겠으나 돌풍이 일어나지 않을까 싶다.

최근 10년 세번을 쓸어간 바르샤, 챔피언스 리그 통산 10회의 우승을 채우기 위한 몸부림의 백곰 군단 레알 마드리드, 지난 시즌 안방에서 남의 집 잔치를 내준 바이에른 뮌헨, 지난 시즌 분데스리가를 완벽하게 정복한 보루시아 도르트문트, 이탈리아에서 선두를 달리며 칼치오 사건의 아픔을 딛고 다시 일어서는 명문 유벤투스.

8강 대진이 흥미진진하다.

[스파키의 축구 이야기] El Classico, 에스파냐와 카탈루냐의 깊고 깊은 갈등의 역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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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스페인 프리메라리가의 레알 마드리드 CF와 FC 바르셀로나 사이의 경기를 가리키는 용어로 세계적으로 가장 흔히 쓰인다. 카탈루냐어로는 엘 클라식(El Classic)이 되며 간혹 엘 수퍼클라시코(El Superclasio, 클라시코의 뜻을 한층 더 강화함), 엘 그란 데르비(El Gran Derbi, 큰 더비)나 엘 데르비 에스파뇰(El Derbi Espanol, 스페인의 더비)로 불리기도 한다. 중남미의 스페인어권에서는 엘 클라시코와 비슷한 이름을 가진 남미의 다른 더비 경기들과 구분하기 위해 엘 데르비라고 더 자주 불린다. 스페인 역사에 남겨진 유명한 스페인 내전은 엘 클라시코의 역사를 가르는 큰 기준이 됐다.
 
레알 마드리드 CF 와 FC 바르셀로나
    첫 경기는 1902년 5월 13일, 코파 델 레이(스페인 국왕컵)의 전신인 코파 데 라 코로나시온(Copa de la Coronacion)에서의 대결이었다. 이 경기는 FC 바르셀로나가 3-1로 승리했다. 이때까지만 해도 경기 도중 크게 과열되는 현상없이 지나갔으나 14년 후 코파 델 레이에서 다시 대결하게 되었다. 양쪽이 서로 홈 경기를 이겼으므로 재시합으로 승부가 결정나게 되었는데, 첫 재시합이 6-6으로 끝나 두 번째 시합이 필요해졌고 문제는 여기서 붉어졌다. 레알 마드리드가 4-2로 리드하자 FC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심판의 판정이 불공정하다며 경기 도중 퇴장해버렸고 레알 마드리드는 이후 결승전까지 진출했다. 결승전에서 어슬레틱 빌바오에 0-4 패배를 당했으나 카탈루냐에서 온 팬들의 위협때문에 경찰의 호위를 받으며 경기장을 떠나야 했다. 이후 1936년 내전이 발발하자 레알 마드리드는 보다 후방에 위치한 스페인 동북부의 카탈루냐 리그에 참여하고 싶다는 요청을 했지만 FC바르셀로나의 반대로 인해 이뤄지지 않았다.

    내전 이후 1943년 6월 13일 마드리드에서 코파 델 레이 준결승 2차전이 열렸다. 바르셀로나에서 벌어진 1차전에선 FC바르셀로나가 3-0으로 승리했고 결승 진출이 유력시되었다. 그러나 프리메라리가에서 부진한 성적을 보이며 10위에 그친 레알 마드리드가 뜻밖에도 FC바르셀로나를 상대로 무려 11-1로 승리했고 이는 의혹을 불러일으켰다. 바르셀로나의 선수들은 카탈루냐 언론들을 통해 2차전이 시작되기 직전 스페인 국가보안부장이 FC바르셀로나의 탈의실에 들어와 “당신들이 마음놓고 축구에서 좋은 성적을 올릴 수 있는 것도 다 우리 정권이 그것을 눈 감아주기 때문이지.” 라고 말했다고 증언했다.
      이를 진지한 위협으로 받아들인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제대로 경기에 임할 수 없었고 전반전에 이미 8-0으로 밀리게 되었다. 정치적 위협은 곧 선수들의 선수 생명, 팀의 명맥유지 그리고 선수, 스텝 등의 가족들에게까지 영향을 미칠 수 있었기에 경기에 임하는데 더욱 힘들어했다. 이에 바르셀로나 선수들은 후반전에 불참하려 했으나, 결국 압력에 의해 후반전도 마저 치르게 되었고 11-1이라는 말도 안되는 결과가 나왔다. 경기 후 스페인 전체에 큰 파장을 일으켰고 결국 양 클럽의 구단주가 스페인 축구 협회의 권고로 퇴임하기에 이르렀다. 후에 레알 마드리드의 구단주가 된 산티아고 베르나베우는 이 경기에 대해 FC바르셀로나 측에 정식으로 사과했고, 이 스코어 또한 스페인 축구 협회에 의해 무효화되었다.
      근래의 사건들 중 큰 사건은 2010년 11월 30일 레알 마드리드 CF가 FC바르셀로나에게 5-0 이라는 충격적인 스코어로 참패한 경기에서 후반 인저리 타임이 거의 끝날 무렵 바르셀로나의 리오넬 메시가 드리블 돌파 도중 레알 마드리드의 수비수 세르히오 라모스로부터 거친 태클을 당하자 바르셀로나 선수들이 몰려와 거친 태클에 대해 어필을 하던 중 푸욜의 뺨을 밀치고 이후 바르셀로나의 골키퍼 빅토르 발데스의 목을 잡고 밀치는 비신사적 행위로 퇴장을 당했고 라모스는 퇴장을 당하면서도 바르셀로나의 사비 헤르난데즈가 대화를 걸어오자 역시나 뺨을 밀치며 나가버리는 등 스포츠맨쉽에 어긋나는 행동을 하고 말았다. 경기 직후 이 사건은 전세계가 주목했던 거대한 경기의 격을 떨어뜨린 행위라며 비판을 받았다. 더욱이 2010 남아공 월드컵 축구 대회에서 스페인이 우승할 당시 우승 주역들이 주를 이루었던 경기에서 터져버린 사건이였기에 더욱 안타깝게했다. 본래의 라이벌 의식에 더해져 5-0이라는 충격적 스코어 그리고 스포츠맨쉽의 상실이 낳은 조금은 축구계와 팬들에게 씁쓸했던 사건이다.
 
레알 마드리드의 세르히오 라모스가 바르셀로나의 카를레스 푸욜의 뺨을 밀치는 사건


    이 두 팀간의 신경전은 필드 바깥에서도 치열했다. 1953년 FC바르셀로나는 콜롬비아의 명문 클럽 CD 로스 미요나리오스(Los Millonarios)의 스타 알프레도 디 스테파노(Alfredo Di Stefano)와 이미 이적에 합의한 상태였는데 디 스테파노는 구단으로부터 이적 허가가 나오기도 전에 독단적으로 콜롬비아를 떠나 스페인에 입국하였으므로 법적 문제가 생겼다. 이 때문에 스페인 축구 협회는 디 스테파노가 FC바르셀로나에 들어가는 것을 일단 중지시켰는데 이 와중에 레알 마드리드의 구단주 산티아고 베르나베우가 개입해 디 스테파노 영입을 시도했다. 법적 문제가 해결되지 않은 이상 디 스테파노와 FC 바르셀로나의 계약 역시 유효화되지 않은 상황이었으므로 경우에 따라선 디 스테파노가 FC바르셀로나가 아닌 다른팀으로 이적하는 것도 가능한 상황이었다. 5월부터 이어진 수개월에 걸친 협상 끝에 1953년 9월 15일 양측의 구단주인 카레토와 베르나베우는 디 스테파노가 다음 4년 동안에는 1시즌마다 양 팀에서 번갈아가며 뛴다는 협약에 서명했다. 이 결정은 특히 바르셀로나 팬들 사이에서 강한 불만을 자아냈고, 여론을 의식한 카레토는 디 스테파노가 안전히 레알 마드리드로 넘어가는 것에 동의함으로써 디 스테파노는 레알 마드리드와 4년 계약을 맺게 되었다.
      디 스테파노 사건은 시작에 불과했다. 대표적인 사건의 주인공을 한 명 더 보자면 포르투갈 축구의 황금세대 중심이자 윙포워드의 시초격인 루이스 피구이다. 그는 1995년 부터 2000년까지 FC바르셀로나 소속이었고, 주장 역할까지 맡았으며 인기가 대단했다. 그러나 2000년 라이벌인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을 한것이다. 이적 직후 처음으로 FC바르셀로나의 홈 구장인 캄프 누에 발을 들였을 때는 큰 문제가 없었지만, 2002년 11월 23일 그가 두 번째로 캄프 누 원정 경기에 나섰을 때 사건이 터졌다. 경기 시작 전에 그에 대한 흑색 선전이 난무했고 급기야 경기 도중 바르셀로나 관중들이 피구를 향해 잡다한 물건들을 던지기 시작한 것이다. 여기에는 유리명, 당구공, 잭나이프 등 맞을 경우 큰 부상 내지 심한 경우 사망에 이를 수도 있는 위험한 물건들이였고 어떤 관중은 돼지 머리를 집어던지며 피구를 비난하고 조롱했다. 피구가 코너킥을 차려고 할 때 상황이 심각해지자 주심은 15분간 경기를 중지시켰다. 이 경기 후 스페인 축구 협회는 FC바르셀로나가 2회 동안 캄프 누에서 경기를 하지 못하도록 결정했으나 바르셀로나측은 이 조치에 대해 법적으로 대응했고, 결국 2005년 8월 1일 양측은 바르셀로나가 4000유로의 벌금을 지불하는 것으로 합의를 보았다.
 
레알 마드리드로 이적한 루이스 피구를 조롱하는 캄프 누의 관중들
(원 안은 당시 투척한 돼지머리를 확대한 사진)


    독립을 원했던 카탈루냐인들의 간절함이 고스란히 남아있는 FC바르셀로나, 그리고 그것을 억압했던 군사 정권의 힘을 얻어 성장한 레알 마드리드 이 두 팀간의 더비 경기는 단순 경쟁 심리에 의해 이루어진 더비 경기가 아닌 민족과 민족간의 갈등, 지배 계층과 피지배 계층간의 갈등이 빚어낸 깊고 깊은 정치적, 역사적 뿌리가 만들어낸 더비 경기라 할 수 있다.

[스파키의 축구 이야기] 에브라와 수아레즈 갈등 속에서 찾는 축구판 인종주의의 현주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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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우루과이 출신이자 현재 리버풀 FC에서 활약중인 루이스 수아레즈와 프랑스 출신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의 수비수 파트리스 에브라 간의 사건이다. 2011년 10월 15일 영국 프리미어 리그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FC 간의 경기 직후 인터뷰를 통해 “리버풀의 수아레즈가 내게 인종 차별성 폭언을 10번 이상 퍼부었다.” 라며 분노를 나타냈으며, 이에 수아레즈는 "인종 차별적 의미가 아니었고, 단 한 차례 말했다"며 억울함을 주장했지만, 경기 비디오를 언어학자들이 분석한 결과 수아레즈가 에브라를 발로 찬 후 에브라가 왜 발로 차느냐며 말하자 ‘네가 흑인(Negro)이라서’ 라는 황당한 발언을 하였고, 이에 에브라는 그러한 말을 또다시 한다면 똑같이 발로 차겠다고 말하자 수아레즈는 ‘나는 흑인과 대화안한다.’ 라는 인종주의적 발언을 한것이다. 분석결과를 토대로 영국 축구 협회는 수아레즈에게 8경기 출장 정지 처분을 내린다.
(아래 관련 기사 참조)
 
노란색 표시의 영문 기사가 2011년 10월 15일 경기에서 벌어진 사건의 전말이다.

      
     그러나 이후에도 수아레즈의 인종주의적 행동과 발언은 계속된다. 2012년 2월 12일 역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와 리버풀FC 간의 경기에서 경기 시작 전 원정팀인 리버풀FC     선수들이 악수를 하며 지나가는 과정에서 수아레즈는 에브라의 악수를 무시한 채 악수를 이어갔다. 이에 분노한 에브라는 수아레즈의 팔을 잡아챘으나 물리적 충돌을 우려한 주심의 만류로 일단락되었으나 이 장면은 전세계적으로 이슈가 되었고 반인종주의적인 분위기에 찬물을 끼얹는 것은 물론이였고 전세계의 리버풀FC와 수아레즈의 팬들에게 실망감을 안겨주는 장면이 되어버렸다. 파장은 컸다. 앞서 있었던 사건에서 큰 곤욕을 치루었던 수아레즈가 또다시 인종주의적 행동을 하며 경기 분위기를 전반적으로 더욱 악화시킨것이다.

 
수아레즈가 악수를 거부하고 가자 팔을 붙잡는 에브라

     경기 후 수아레즈는 ‘보이는 것이 전부가 아니다.’ 라며 오해하지 말아 줄 것을 당부했으나 악수 거부 장면이 전세계 축구팬들에게 비판을 받게 되자 수아레즈는 잘못된 사실임을 인정하며 공식적인 인터뷰 석상에서 에브라에게 사과하였다. 그러나 에브라는 이 사과의 인터뷰를 거부하며 축구계에 여전히 자리잡고 있는 인종주의를 강도 높게 비판하였다. 그러나 이 사건 직후 리버풀FC의 팬들 중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마스크가 발견됐다. 백인 우월주의를 상징하는 모양에 리버풀FC를 줄인 LFC가 적혀있고 ‘수아레즈는 아무 잘못이 없다.(Suarez is innocent.)' 라는 문구가 새겨져있었다. 이 마스크로 인해 여전히 축구계에 인종주의의 뿌리가 깊이 남아있다는 것을 알 수 있다. 인식의 변화 없이는 뿌리 뽑을 수 없다는 반증이기도 하다.

백인 우월주의자들의 소행으로 추정되는 마스크