2013년 5월 18일 토요일

[스파키의 축구이야기] 날지못하는 네덜란드인, 데니스 베르캄프 이야기(1)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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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필자가 축구를 처음 보기 시작한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당시 우리나라는 네덜란드, 멕시코, 벨기에와 E조에 속해있었다. 우리나라의 첫경기였던 멕시코전에서 당시 왼발의 달인으로 불렸던 하석주가 멋진 프리킥으로 선제골을 뽑아냈던 기억이 난다. 그리고 거친 백태클로 퇴장을 당했던 기억까지.(가린샤 클럽에 가입하게 된다. 득점한 선수가 퇴장당하게 되면 등재되는 센츄리 클럽과 같은 개념이다. 브라질의 가린샤가 초대 멤버이다.) 이후 두번째 경기에서 네덜란드와 마주쳤다. 이때 네덜란드의 기세는 대단했다. 항상 유럽축구의 강호로 군림하고 메이저 대회에 나오면 우승후보들 중 하나로 손꼽히던 네덜란드였기때문에 상대적 약체였던 우리나라를 상대로 융단폭격을 터뜨렸다. PSV 아인트호벤에서 박지성과 함께 뛰어 팬들에게 잘 알려진 필립 코쿠의 선제골을 필두로 '로켓맨' 마르크 오베르마스, 갓 아스날로 이적하여 주가를 올리던 데니스 베르캄프(이하 베르캄프), 네덜란드의 간판 스트라이커였던 피에르 반 후이동크, 당시 AC밀란에서 형제였던 프랑크 데 보어와 함께 맹활약중이던 로날드 데 보어에게 연방 얻어맞으며 5:0이라는 처참한 스코어로 패배하는 것을 보았다.(그리고 당시 우리나라 감독이였던 차범근은 대회 중도 경질이라는 충격적인 통보를 받고 세간의 화제가 되었다.) 이후 3차전에서 벨기에를 만나 한 골씩 주고 받으며 무승부를 기록했고 조 최하위로 탈락했고 세 경기 무승부를 기록한 벨기에는 3위로 탈락했다.

1998년 프랑스 월드컵 네덜란드 국가대표팀 선발라인업

98년 월드컵 당시 데니스 베르캄프

 이 세 경기 중 네덜란드 전을 가장 인상깊게 보았고, 어린 필자의 시선을 잡아끈 선수는 바로 베르캄프였다. 사실 오베르마스의 폭발적인 슈팅에도 인상이 깊었지만 그보다 경기내내 유연한 움직임을 보이며(물론 당시에는 이렇게까지 생각은 안했으나) 골을 만들어낸 베르캄프에게는 '무언가 있다.' 라는 생각을 하게끔 했고 이후 데이비드 베컴이라는 선수를 알게 되면서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이하 맨유)의 경기를 찾아보게 되었다.(당시 인터넷 보급률도 떨어졌고 해외축구를 보려면 굉장히 많은 시간과 노력을 요했다.) 맨유의 경기를 챙겨보던 그때 맨유가 속한 잉글랜드 프리미어 리그(이하 EPL)에 아스날이라는 클럽과의 경기에서 다시 베르캄프를 보게되었다. 당시 맨유의 최고 라이벌은 리즈 유나이티드(이하 리즈)였다.(현재 2부 챔피언쉽 소속) 리즈가 파산으로 클럽이 2부, 3부 리그로 강등되기 전까지는 맨유와 리즈의 더비 매치를 '장미 전쟁'이라고 했다.(요즘은 저지 색깔로 인해 리버풀과의 경기를 명명한다.) 그러나 아스날과의 경기도 이 더비 못지않게 치열했고 그래서 어린 필자는 아스날을 매우 싫어했다. 하지만 유일하게 좋아하던 선수가 바로 베르캄프였고 맨유와의 경기에서 베르캄프가 공을 잡으면 미묘하게 두려움 반 기대감 반이였다. 그가 공을 잡으면 무언가 멋진 장면을 만들어 낼것만 같았고 한편으로는 그 멋진 장면이 맨유에게 치명타가 될것만 같아서 두려웠다.

 어린 필자를 들뜨게 했던 베르캄프는 1969년 5월 10일 네덜란드의 수도인 암스테르담에서 태어났다. 베르캄프의 이름에는 재미난 일화가 있다. 스코틀랜드와 맨유의 전설적인 스트라이커였던 데니스 로를 너무도 좋아한 베르캄프의 아버지가 Denis라는 이름을 아들에게 붙여주려했으나 당시 이름 형식에 어긋난다는 이유로 Dennis가 된것이다.(Dennis는 네덜란드에서 통상 여자 이름으로 많이 쓰였다.) 12살이 되던 해 1981년 암스테르담 연고의 클럽이였던 AFC 아약스(AFC Ajax, 이하 아약스)의 유스(youth) 클럽에서 커리어를 시작했다. 이후 1986년 17살이 되어 아약스 성인팀에 명단을 올리며 정식 프로 선수로써의 커리어가 시작되었다.
아약스 시절 베르캄프

아약스 시절의 활약상

 성인팀 첫 데뷔 시즌이였던 86/87에는 14경기에 출장하며 2골을 기록했고 이후 88/89 시즌 30경기 13골이라는 기록을 세우며 20세되던 베르캄프에게 환상적인 시즌이 되었다. 그 다음 시즌에는 8골로 부진하다가 90/91시즌을 기점으로 세 시즌 연속 에레디비지에 득점왕을 차지하며 유럽 대륙에 이름을 알리기 시작했다.(총 91경기 출장 75득점) 특히 이 중 91/92 시즌에 있었던 UEFA컵에서 6골을 기록하며 아약스를 우승으로 이끄는데 큰 일조를 했다. 이 맹활약은 그 해 이적 시장에서 빅클럽들로부터 러브콜로 이어졌고 레알 마드리드, 유벤투스, 인터밀란 등으로부터 제의가 들어왔다. 하지만 이 클럽들 중 레알 마드리드에 대해서는 네덜란드의 축구 영웅이자 '천재'라 불린 요한 크루이프의 충고로 거절하게 되었고 이탈리아 세리에A에서 선수생활을 이어가기로 결심한 베르캄프는 유벤투스와 인터밀란 두 클럽을 두고 저울질했고 1993년 2월 16일 710만 파운드의 이적료로 인터밀란으로 이적했다.

 새로운 리그에 대한 기대감과 더불어 베르캄프에 대한 인터밀란의 기대감 또한 대단했다. 1993년 8월 29일 레지나와의 경기에서 데뷔전을 치르고 세 달 뒤 11월이 되서야 첫 골을 맛본다. 세리에A 전반적인 클럽들의 수비는 네덜란드와는 다르게 상당히 거칠었고 이에 적응하는데 실패한 베르캄프는 첫 시즌에 리그에서 31경기에 출장해 8득점만을 기록했다.(리그컵, 유럽대항전을 포함하면 총 55경기 출전 25득점) 첫 93/94 시즌을 만족스럽지 못하게 보내고 1994년 미국 월드컵에 네덜란드 국가대표로써 출전한다. 하지만 설상가상 이때 부상을 당하게 되고 이로 인해 시즌을 제대로 소화해내지 못한다. 부상에서 회복되고도 제 기량을 끌어올리지 못하며 리그에서 21경기에 출전해 3골을 넣는 극심한 부진에 시달린다.(리그컵, 유럽대항전을 포함하면 총 26경기 출전 5득점) 극심한 부진에 빠진데다가 상당히 공격적이기로 유명한 이탈리아 언론과 팬들과의 관계 또한 좋지 못했던 베르캄프는 세리에A를 떠나고자 마음을 먹는다. 물론 당연히 부진한 성적은 클럽에서도 더이상 베르캄프를 데리고 있을 이유가 없었다.

인터밀란 시절의 베르캄프

인터밀란 시절 활약상

 1995년 2월 인터밀란의 구단주였던 마시모 모라티가 직접 나서서 베르캄프를 이적시키는데 나섰고(그만큼 투자대비 최악이였다고 판단되었기에) 베르캄프를 데려오는데 사용한 710만 파운드의 1/3도 안되는 210만 파운드에 아스날로 이적을 성사시켰다. 베르캄프를 영입한 아스날에게 모라티는 "과연 베르캄프가 몇 골이나 넣을지 궁금하다. 5골 이상을 넣으면 정말 기적이다." 라며 비웃기까지 했다. 베르캄프에게 있어서는 선수 인생 최악의 시기였다고 할 수 있었다.

 하지만 모라티의 비웃음은 이적 첫 시즌부터 처참하게 깨졌다.
아스날에서의 전설같은 이야기가 시작된 것이다.

2편에서 계속됩니다. ->누르시면 2편으로~!

2013년 5월 16일 목요일

[스파키의 축구이야기] 유벤투스, 칼치오폴리를 떨친 왕의 귀환.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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2002/2003 UEFA 챔피언스 리그 결승전에서 같은 리그 소속인 AC밀란과 혈투를 벌이며 승부차기에서 아쉽게 패배하며 마지막 키커였던 안드리 셰브첸코의 포효를 바라보며 잔디에 주저앉을 수 밖에 없었던 유벤투스.

결승전에서는 패배했지만 그해 시즌의 리그는 유벤투스가 우승을 차지했다.
그러나 이후 다음 시즌에는 리그에서 밀란이 왕좌를 차지하며 확실하게 유벤투스의 콧대를 눌렀다.

절치부심한 유벤투스는 이후 04/05 시즌에서 스쿠데토(세리에A 우승팀에게 주어지는 뱃지)를 빼앗아왔다.

05/06 시즌마저 유벤투스가 스쿠데토를 유지하며 명실상부 유벤투스의 시대를 열었다.

그러나 2006년 어느날.

당시 유벤투스의 단장이였던 루치아노 모지가 심판배정관이었던 파울로 베르가모와의 전화통화에서 유벤투스에게 우호적인 판정을 내리는 심판을 배정하라고 압력을 넣었다는 사건이 터졌다.

칼치오폴리의 주범(?) 루치아노 모지 유벤투스 단장

언론은 유벤투스 때리기에 나섰고 리그를 휩쓸고 챔피언스 리그에서도 우수한 성적을 거두고 있었던 유벤투스였기에 여타 팀이 들고 일어선 것은 당연한 일이였다.

이 사건에는 비단 유벤투스 뿐만 아니라 피오렌티나, AC밀란, 라치오 등 세리에A 명문클럽들이 다수 연루되어 있어 상당한 충격을 불러왔다.

이 사건으로 유벤투스는 04/05, 05/06 스쿠데토를 박탈당함은 물론 세리에B로의 강등을 지시받았다. 피오렌티나, AC밀란, 라치오는 각각 승점을 30점씩 감점당했고 스쿠데토는 어부지리로 인테르가 가져갔다.

설상가상으로 해당 진행중이던 06/07시즌 유벤투스는 9점, 피오렌티나는 15점, 레지나 칼치오는 11점, AC밀란은 8점, 라치오는 3점의 승점을 각각 삭감당하며 유벤투스는 세리에B에서 승점을 -9점에서 시작할 수 밖에 없었다.

그러나 이후 사건이 무죄로 판결이 되고 인테르가 어부지리로 가져간 05/06 스쿠데토를 되돌려 받으려 했으나 인테르가 돌려줄 수 없다고 거부하는 웃지 못할 해프닝으로 마무리되었다.(당시 인테르는 AC밀란과 유벤투스에 뒤처져 만년 3등의 이미지에서 벗어나지 못했기 때문이다.)

혐의에서 벗어났지만 이미 -9점으로 세리에B에서 시즌을 시작한 유벤투스는 몇몇 주요선수들이 강등을 이유로 클럽을 떠났으나 대부분의 선수들이 클럽에 잔류하여 팀을 정상화하는데 힘을 쏟았다.
그 결과 한 시즌만에(델 피에로는 세리에B 역사에 획을 그을 득점 기록을 남겼다.) 세리에A로 복귀했다.

그야말로 왕의 귀환이였다.
하지만 세리에A는 이미 인테르의 천하가 되어있었다.
유벤투스를 더욱 슬프게 한것은 강등 이전에 유벤투스 공격력의 핵심을 이루었던 즐라탄 이브라히모비치가 인테르의 주포로 대활약하고 있었던 것이다.

스쿠데토를 되찾기 위한 유벤투스의 멀고도 험한 여정이 시작되었다.

한때 세리에A 뿐만 아니라 유럽 전체를 쥐고 흔들 정도의 전력을 자랑하던 유벤투스는 온데간데 없었고 이제 갓 1부리그로 올라온 승격팀으로 다시 시작했다.

공식적인 스쿠데토의 기록은 02/03에 멈춰있었다. 07/08 시즌 세리에A에서 3위라는 기염을 토해내며 승격팀(?)이라고 하기엔 너무도 강력한 경기력을 선보였고 08/09 시즌에는 준우승을 거두며 왕의 귀환 예고편을 끝마치려했다.

하지만 이후 09/10, 10/11 두 시즌 연속으로 7위라는 초라한 성적표를 받으며 왕의 귀환은 실패로 돌아가는가 싶었다.

승격에 혁혁한 공을 세웠던 선수들은 하나둘 은퇴하기 시작했고, 강력한 미드필드진의 상징이였던 파벨 네드베드마저 은퇴하고 세대 교체 시기가 맞물리며 클럽 전력에 흔들렸기 때문이다.

매해 일정한 스쿼드를 유지하지 못하고 영입 방출을 매해 여러번 반복하던 탓도 컸다.

감독교체가 잦아졌고 교체될때마다 팀의 색깔이 바뀌는 것은 당연지사였고 이에 적응해야하는 선수들에게도 곤욕이였다.

하지만 11/12 시즌 안토니오 콘테 감독이 부임한 이후 이적시장에서 알짜배기 선수들이 영입됐고(이전 감독들의 영입은 거의 대부분 실패작 또는 퍼즐의 조각들이였다.) 흩어져있던 조각들을 모아 다시 퍼즐을 끼워맞추기 시작했다.

경기력이 안정을 되찾아가며 자연스럽게 유벤투스 특유의 카테나치오가 정상궤도에 오름과 동시에 공격력이 폭발했고 이는 곧바로 리그 우승이라는 결과로 이어졌다.

왕의 귀환.
유베의 팬들은 5년만의 한을 풀며(게다가 사건이 무죄판결을 받았으니!) 환호를 내질렀고
선수들은 미친듯이 그라운드를 뛰어다녔다.

11/12 시즌 우승, 왕의 귀환!

무죄판결을 받고도 세리에B를 개의치않고 너무도 쿨하게 우승하며 본의아니게 클럽역사에 세리에B 우승이라는 기록을 남겼지만 이탈리아 축구 팬들의 31%가 유벤투스의 팬일 정도로 사랑받던 이 클럽은 5년 간의 팬들의 신뢰를 받으며 그 보답으로 스쿠데토를 되찾아왔고

콩테 감독은 11/12 시즌 AC밀란의 세대교체에 밀려나온 안드레아 피를로를 영입했고
이는 신의 한수가 되었다. 피를로가 회춘(?)하며 대활약을 펼치며 2연속 우승의 핵심은 피를로였다 할 수 있을 만큼 활약을 펼쳤다. 피를로와 함께 엄청난 활동량으로 미드필드 삼각편대를 이루었던 아투로 비달과 마르키시오 또한 혁혁한 공을 세웠다.


2연속 스쿠데토를 차지한 유벤투스는 이제 다음 시즌 챔피언스 리그를 바라보고 있다.

FORZA JUVE!!